
태형&진욱과 함께 오로라를 보러 가자며 모으던 돈을 싹 털어서 제주 신라호텔에 다녀왔다.
우리는 일 년 전부터 오로라를 보러 가기 위해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코로나 녀석이 어마무시한 대역병인 줄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아이슬란드로 갈지 캐나다로 갈지 고민을 했다. 그래서 셋이 모인 단톡방 이름도 '오로라 자산운용'으로 비장하게 바꿔놓고 매달 돈을 부었다. 하지만 일 년 만에 우리는 오로라고 나발이고 일단 여행 갈증부터 해결하자는 결정을 해버렸고, 그 결과 3일 만에 365일 동안 모은 216만 원을 쓰고 왔다.

작은 돈이지만 일 년간 모은 우리를 최대한 귀하게 여기고 싶었다. 한국에서 5성급 호텔에 가본 적도 없고 더군다나 여름에, 그것도 주말에 다녀올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신라호텔을 선택하게 됐다. 원래는 서울 신라호텔 예약을 추진했으나 제주 신라호텔보다 값이 비싸 실패했다. '호기로운 FLEX'를 지향했건만 계획부터 호기로움을 상실했다. 역시 돈 녀석은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2박 3일 동안 돈이 사람을 어떻게 귀하게 느끼게 해주는지 조금 더 배우고 올 수 있었다. 그곳은 24시간 동안 내 기분을 좋게 하고자 곳곳에 필요한 물건들이 놓여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일찍이 두 달 전에 예약을 마쳤다. 그러길 얼마나 잘했는지 한 달 뒤에나 깨달을 수 있었다. 유월부터 이미 예약 가능한 방이 없었다. 희귀한 무언갈 쟁취한 것만 같아서 기대감이 아주 컸고, 동시에 기대한 것만큼 좋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하지만 걱정은 룸에 도착해 창문을 열면서 사라졌다. 이미 입구에서부터 산뜻한 응대가 기분을 살살 간질이더니 탁 트인 풍경이 일말의 응어리까지 사르르 녹였다. 가든뷰는 오션뷰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고층을 요구하면 이렇게 정원과 더불어 바다까지 볼 수 있다. 묵는 내내 잔뜩 흐리거나 억수로 비가 내렸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는 게 참 좋았다. 내가 사는 곳과는 아예 딴 판인 풍경과 소리는 다른 걱정도 2박 3일 동안은 없애줬다.


첫째 날은 원래 숙성도에 다녀오는 일정뿐이었지만 호텔로 가는 리무진 안에서 호텔 저녁 행사인 '와인 앤 로맨스'도 즐기기로 했다.
와인 앤 로맨스는 투숙객이 인당 5만 원을 내면 라이브 공연과 각종 와인을 낭만적으로 즐길 수 있는 행사다. 우리는 일찍이 저녁을 먹고 곧장 이 행사 장소로 달려갔다. 가자마자 제공되는 샴페인에 눈이 뒤집혀 전투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우리를 포함해 두 테이블뿐인데 이렇게 황송하게 라이브 공연을 즐겨도 되나 싶었지만 30분도 되지 않아 샴페인 세 잔을 때려 마시고 완전히 음악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로맨스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우리의 음주 양과 속도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행사 이름을 '와인 앤 만취'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샴페인과 와인을 잔뜩 때려마셨다. 저 중에 특히 볼랭져 스페셜 뀌베 브뤼, 크레망 드 부르고뉴 피노누아가 아주 맛이 좋아 집중적으로 때렸다. 지금은 찍어온 와인 리스트를 보며 풀 네임을 읽을 수 있지만, 저 당시에는 알코올이 너무 얼큰하게 올라와 눈이 흐렸고 모든 와인을 '이거'라고 부르며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며 우리가 분명 신라호텔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거라고 확신했다. 감히 고급진 호텔에서 샴페인 오조오억 잔을 허버허버 들이켠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될 것만 같았다.
체크아웃을 하고 혹시 우리 때문에 '와인 앤 로맨스' 이용료를 올리지 않았을까 확인도 해봤다. 다행히 그대로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있진 않았나 보다.

차마 글로 전할 수 없는 우당탕탕 에피소드를 만든 후에 객실로 돌아오니 허기가 졌다. 룸서비스로 짬뽕과 크림 스파게티를 시켜먹었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안에 해산물이 너무 잔뜩이라 서로 마구 양보하는 아름다운 그림도 연출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그 두 가지 음식이 10만 원 돈이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하지만 허기는 내게 놀랄 틈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전날 세 시까지 이어지던 과식 바이브를 내 몸은 잊지 않았고 일곱 시 반에 맞춰 파크뷰로 이끌었다. 친구들은 쿨쿨 자길래 먼저 내려가 이것저것 먹었다. 빵, 오믈렛, 딤섬, 커피가 아주 맛있었다. 그렇게 홀로 두 시간을 때려먹었다.
'바쁜 돼지는 숙취에 괴로워할 시간도 없다'는 옛말(네?) 하나 틀린 거 없다. 나의 날씬이 친구들은 사만 원이 훌쩍 넘는 조식을 고상하게 두 접시쯤 먹더니 식사를 마쳤다고 했다. 나만 세 시간 가까이 입과 손을 바삐 움직였다. 분하다.


아침을 먹고 방에 다시 올라가 잠시 쉬다가 그날의 유일한 일정 '망고빙수 먹기'를 실행하려고 했다. 이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원래 빙수를 먹으려고 했던 로비 라운지 바당에선 기약 없는 기다림을 선고했고, 풀사이드바에선 두 시에 요이땅! 하고 달려오면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일단 바당에 리스트를 올리고 수영을 하러 갔다. 정말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덜트 풀의 분위기가 줄초상 재질이라 활기찬 키즈 풀로 자리를 옮겼다. 나보다 수영을 훨씬 잘하는 어린이들 옆에서 수영 흉내를 조금 냈더니 금방 두 시가 됐다. 젖은 몸을 다시 말리고 라운지로 가느니 그대로 풀사이드바로 가서 빙수를 먹기로 했다. 짬뽕과 망고빙수를 먹었다. 둘 다 아주 맛이 좋았다. 그렇지만 하루의 유일한 일정이 될 만큼 맛있지는 않아 아쉬웠다. 이리저리 대기를 문의하고 돌아다니는 동안 기대감이 아주 커졌나 보다.

수영을 조금 더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다시 파크뷰에 갔다. 둘째 날은 디너를 포함한 패키지로 예약을 했다. 아주 먹기에 바쁜 날이었다. 아니 일정 전체가 호텔 다이닝 탐험에 가까웠다. 다음 날 체크아웃 후 먹은 브런치까지 파크뷰에서 세 차례, 풀사이드바에서도 한 차례, 룸에서 룸서비스로 두 차례 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제주 신라호텔 식사 후기, 근데 이제 숙박과 만취를 곁들인....'으로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좋은 것들도 많았는데 쓰다 보니 온통 먹은 이야기뿐이다.

얼레벌레 다른 기억도 끄집어내 보자면 침구도 정말 좋았고, 우리가 단체로 조갈이 날 때마다 물을 방까지 가져다주시던 감동 좔좔 서비스가 기억에 남는다.
침대 매트리스와 침구가 너무너무너무 포근해서 아주 잠을 잘 잤다. 라텍스 베개와 바디 필로우까지 요청해 편안한 침구 속에 파묻히니 잠이 솔솔 왔다. 집에서는 항시 불면에 시달렸는데 이게 모두 값비싼 매트리스와 침구가 없어서인가 싶었다. 물론 그건 온종일 들려오는 빗소리와 새소리의 덕이기도 하고, 하루 종일 신이 나서 떠들거나 수영을 하거나 한 덕이기도 하겠지만 질 좋은 잠자리의 몫이 크다.
수화기를 들고 0번을 눌러 뭐든 원하는 것을 말하면 방으로 가져다주는 황송한 대접도 잊히지 않는다. 룸 슈즈와 선풍기와 베개 여섯 개와 각종 음식과 물을 받았다. 수화기가 마치 마법 지팡이 같았다. 특히 우리가 아주 많은 양의 베개와 물을 요청했는데 모두 웃으며 가져다주셨다. 웃고 계셨지만 혹시 우리를 베개 빌런, 혹은 물 빌런으로 기억하진 않으실지 조금 걱정이다. 첫째 날엔 만취 빌런이기도 했으니 내가 다시 신라호텔에 출입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다음에 혹여 예약을 했는데 호텔 측에서 거절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집에 가기 전에 잠깐, 누구에게든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으며 좋은 것을 먹고 좋은 데서 자던 기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짧게 지났다. 또 있으면 좋겠지만 한 번으로도 충분한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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