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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기억

2018년 방콕 대첩...아니 여행기, 그리고 사과문2

by 루트팍 2021. 9. 15.



2018년 대학교 동기들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태국을 여행했다.
치앙마이, 파타야, 방콕 이렇게 세 도시에 총 10박 11일간 머무르는 일정이었다. 매 방학마다 국내의 이 도시 저 도시를 여행하긴 했어도 해외로 가는 것이, 그리고 이렇게 긴 여행을 함께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2018년 2학기는 1학년 때부터 함께 다닌 동기들과 다 함께 다닐 수 있는 마지막 학기였다. 우리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정기적인 여행을 조금 더 먼 곳에서 조금 더 길게 해 보고자 태국 10박 11일 여행을 결정했다.

이름을 까먹은 파타야의 어느 섬


2년도 훌쩍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호들갑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어떻게든 주기적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다. 그래도 그때 호들갑을 떨길 잘했다. 지금은 2박 3일을 넘는 일정을 만들어내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케익이 멋나고 맛난 치앙마이의 어느 카페


1. 왜 방콕 대첩인가
태국의 세 도시에 다녀왔는데 왜 방콕 대첩인가 하면, 방콕에서부터 못난 마음이 본격적으로 시작해 절정을 달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슈주의 방콕대첩이 탐나서 따라하고 싶었다.

치앙마이에서 묵었던 호텔의 앞마당


2. 사건의 발단 - 서울
이 사건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시작됐다. 일곱 명이 열흘 동안 가는 여행이기 때문에 모든 결정에 의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잘 곳.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등 하나하나 엇갈렸다. 극강의 J인 현호, 진희와는 아주 많이 부딪혔다. 특히 수상 액티비티에 일절 흥미가 없는 내게 현호가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고 했을 때 뿔이 단단히 났던 기억이 난다. '대체 왜?!?!?!?? 싫다는데 왜?!?!!? 쒸발!!!!!!!!!!!!!!!!!!' 하고 속으로 외쳤고, 카톡으로 싸우기도 했다.

나는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같은 숙소에 묵으며, 가끔 밥을 같이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몇몇 친구들은 같이 간 김에 이것저것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는 날까지도 이 생각은 좁혀지지 않아 마음의 벽이 아주 단단히 자리잡았던 것 같다. 인천공항에서 혼자 면세품을 수령하러 갔다 오면서 다솜이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다. 다솜이에겐 무를 수 있다면 무르고 싶다고 우는 소리를 하고 괜찮은 척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치앙마이에서 먹은 맛나고 멋난 케익, 그리고 아메리카노


3. 여행의 시작, 악귀의 탄생 - 치앙마이

첫 여행지는 치앙마이. 밤중에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떨어져 새벽 치앙마이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시간이 시간이 떴다. 여기서 못된 마음에 불이 지피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공항노숙이다. 나는 떠나기 전부터 공항 근처 호텔에서 잠깐이라도 자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냐는 입장이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항 노숙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괜찮을 수도 있지 않나 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쿨쿨 잘만 자는 친구들이 원망스러웠다. 악귀가 이때부터 씌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공항 호텔이야 내가 알아서 다녀왔으면 됐을 텐데, 잠을 못 자 예민해지니 남 탓을 했다.

예민해진 정신머리를 가지고 도착한 치앙마이는 썩 멋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멋졌다. 그래서 내 마음 속 악귀가 잠시 진정할 수 있었다.

어쩌다 먹게된 줄 모르겠는 디저트



너무 멋있는 치앙마이의 모습에 감탄하며 다니던 와중에 악귀가 다시 고개를 들게 된 계기가 있다.
치앙마이에서 혼자 다니기로 한 날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만 혼자 다닌 날이 되었지만 뭐든 좋았다. 혼자 치앙마이 여기저기를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다. 여자 저차 하여 숙소로 돌아와 잘 준비를 하는데 여행 경비로 부딪히는 일이 생겼다. 우리는 돈을 한 데 모아 날마다 여행 경비를 나눴다. 혼자 다니는 날도 그렇게 각자 같은 돈을 나눠가졌는데 결과적으로 나만 혼자 다녔으니 나만 남은 돈이 달랐다. 그런데 남은 돈을 다음날 경비로 편입시키자는 의견이 있어 뿔이 났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뿔날 일이 아니었는데 괜히 뿔이 났다. 혼자 다니는 날을 침범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모두가 함께 해야한다는 것에 대한 적대감이 이상하게 표출된 것 같다. 아마 다음 날까지 대원이에게 투덜댔던 것 같다.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릴 때까지도 뿔이 나서 티를 팍팍 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ㅡㅡ 친구들아 이해 안 돼도 욕 하지 마.... 일기장에 각자 적기!)

치앙마이의 어느 성곽?어쩌구....


4. 악귀가 사람 잡는다 -방콕 1

치앙마이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방콕의 생경하고 멋진 풍경 덕에 악귀가 약간 퇴치됐다. 특히 방콕의 고가들이 너무 좋아서 감탄했다. 말도 안 되는 교통체증이 매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도로와 건물의 외관이 예뻐서 아주 좋았다.




그러나 악귀가 아예 물러나지는 않은 것이 큰 화근이었다. 덥고 피곤해지면 괜히 골이 났는데 그걸 애먼 친구들에게 풀었다. 혼자이고 싶은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 함께하는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혼자이고 싶어 새벽에 홀로 돌아다녔다. 새벽 댓바람부터 고가를 구경하며 쏘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 같다. 상점에서 만난 사람들의 온화한 태도와 따뜻한 날씨가 새벽도 안전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별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혼자 고가 위도 걸어다니고 공원도 걷고 커피도 마시고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으나, 이게 악순환의 고리이기도 했다. 똥아침부터 체력을 잔뜩 쓰니 낮엔 더 피곤하고 지쳤다. 고스란히 예민함과 짜증은 친구들의 몫이 됐다. 그러면 또 새벽에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또다시 예민해지는 반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그땐 귀신이 단단히 씌어서 악순환을 끊어낼 생각도 안 했다.




너무너무너무 멋진 왓아룬



5. 악귀가 칼춤을 출 때 - 파타야


피곤함은 파타야에 갈 시점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절정에 달했다. 이 여행은 애초에 ‘방콕에서 크리스마스를’이라는 타이틀로 기획될 만큼 크리스마스 일정에 방점을 찍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을 보내는 파타야에서의 일정이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리의 성전



진리의 성전이라는 아주 멋진 사원에도 가고 국립 공원인 어느 멋진 섬에도 갔다. 특히 호텔 방도 아주 멋졌는데, 나와 대원이는 방의 두 면이 통창으로 된 코너룸에 묵어서 멋진 바다를 실컷 감상할 수 있었다. 낮에 섬에 가서 수영을 한 날에는 호텔 뷔페에서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그곳에서 아주 근사한 크리스마스 만찬을 하려고 했다. 물론 우리끼리의 식사는 즐거웠지만 주위가 말썽이었다. 홀의 중앙에 길게 앉은 우리를 둘러싸고 온통 성구매남과 그의 짝들뿐이었다. 실험 카메라인 줄 알았다. 아무리 성구매 남성들로 넘쳐나는 파타야라지만 그들을 크리스마스에 식당에서까지 다발로 마주할 줄은 몰랐다. 밥을 먹다 분개하다가 어이가 없어 웃다가를 반복했다.

겉모습은 요상하지만 수영장과 객실은 아주 예쁘다. 파타야 시암어쩌구디자인호텔




밥도 잔뜩 먹고 와인도 잔뜩 먹고 파타야 해변으로 갔다. 금방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 해변을 걷자고 했다. 싫은 티를 팍팍 내던 와중에 나의 개썅마이웨이 선배 소윤이가 자신은 피곤하니 방으로 들어가겠노라고 단호하게 말해준 덕에 얼레벌레 함께 호텔로 갈 수 있었다. 씻고 자려는 찰나에 연락이 왔다. 가장 넓은 방인 우리 방에서 맥주 파티가 개최된다는 소식이었다. 가장 넓은 방을 쓰니 당연한 건데도 괜히 골이 났다.


친구들의 맥주 권유를 사양하며 상당히 비협조적으로 참여했다. 골이 난 것도 난 거지만 진짜 너무 피곤해서 눈이 막 감겼다. 반쯤 감긴 눈 앞으로 어느 순간에 빈 종이들이 나타났다. 진희가 각자에게 편질 써주자며 가방에서 엽서를 꺼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식순이었다. 피곤함, 졸려움, 예민함, 귀찮음이 한순간에 증폭해 악귀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편지지에 쓰나 마나 한 말들을 대충 적었다. 너무 피곤한 상태에서 적어 지금은 사실 뭘 적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친구들도 내가 쓴 것을 읽고 아주 어이없어했다. 그럴 만했다.

내가 알아서 골이 나서 꼬라지를 부려놓고 또 단단히 토라졌다. 그 상태로 다시 방콕으로 향했다.


뫼벤픽 호텔 수영장에서 현호가 찍은 사진


6. 아마도,,,,랑종? - 방콕 2

우리는 마지막 2박 3일을 다시 방콕에서 보냈다. 이때 살면서 5성급 호텔에 처음 가봤다. 나나역 근처에 있는 뫼벤픽 호텔이라는 곳이다. 아주 저렴한 값에 뛰어난 룸 컨디션과 다채로운 조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방콕에 가면 또 묵고 싶다. 오후 4시부터 5시에는 투숙객들을 대상으로 초콜릿 아워를 운영하는데 온갖 초콜릿 디저트들을 맛볼 수 있다. 이틀 모두 방문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호텔이 만족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이때부터는 악귀의 폭주가 계속되었다. 친구들이 밤에 카오산 로드를 가자고 할 때 피곤해서 못 가겠다고 하고 방에서 잠을 자고 룸서비스를 시켜먹었다. 마지막 날엔 혼자 하릴없이 호텔 옥상 정원에 누워있다가 고가를 걸어 다녔다. 음식점을 두 군데나 들러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이때 혼자 다닌 기억들은 혼자 무언가를 즐긴다기보다는 괜히 골이 난 상태로 혼자 분을 삭이는 과정이었다. 2박 3일 동안 그 누구도 나를 화나게 하지 않았는데 귀신에 씐 것처럼 혼자 씩씩댔다. 태국 귀신 랑종어쩌구가 아니었을런지…….

이렇게 방콕 대첩(?)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호텔 옥상


7. 사과문

사실 시간 순서대로라면 이 여행에 대한 사과문이 포르투갈 사과문보다 먼저 올라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건 진짜 내가 싼 똥 중에서도 스케일이 가장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행 후로 3개월 간 함께 여행을 한 친구들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땐 정말 한국에 돌아와서도 타격이 사라지질 않아 몸져누웠었다. 이 글을 쓰며 당시를 복기하니 그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너무 겁이 나서 ‘악귀’라 칭하며 그 당시의 나를 타자화하게 된다.

나도 나지만 영문도 모르고 연락을 끊긴 채 답답함을 참아내야 했던 찬구들이 더 고생이었다. 이 글로 다시 한번 혁, 대원, 진희, 효연, 현호, 소윤에게 미안함을 전달하고 싶다. 괴팍하고 고집불통인 친구를 인내하고 아직도 놀아주고 있어서 고맙기도 하다. 이후에 짧은 여행을 몇 번 함께했지만 다시 긴 여행을 친구들이 다시 해줄지 모르겠다.

질리게 해서 미안해 친구들아,,,,,,,,, 우리 아직 친구 맞지?!ㅜㅜㅜㅠㅠ 맞다고 해줘 ㅠㅜㅠㅜㅠㅜㅠㅜㅜㅠㅜㅠㅜ내가 잘잘 잘못했어………

* 이 모든 참극은 총 네 편의 영상으로 기록 및 편집되어 있다. 종종 악귀의 모습이 나타나며, 전체적으로 우리 여행의 분위기가 잘 묻어나있다. 볼 때마다 너무 재밌어서 죽을 지경.

https://youtu.be/hPfgU_YHGo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