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유선이와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는 거였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유선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게 통화를 하는 능력자다. 통화를 시작하면서 일단 깔깔 웃었다. 유선은 내게 취업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어온 거였다. 나의 오랜 백수 동료가 이렇게 떠나가니 슬펐지만, 그래도 새로운 시작을 하는 그가 멋있으니 축하해 마땅했다.

어제 한 통화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는지 오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유선이 생각이 났다. 정세랑의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은 덕이다. 여행과 친구 이야기가 잔뜩 나오는 그 책을 읽으며 유선이가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선이와는 2019년에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여행을 함께했다. 그중에서 2019년 늦여름에 포르투갈을 함께 여행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강렬하다. 9월까지도 여름이 한창이던 포르투갈에서 아름다운 것도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포르투갈 여행을 통틀어 포르투의 해질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매일 같이 언덕에 앉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해가 떨어지며 온갖 빛깔로 하늘은 물들었는데 그 색들이 너무 거짓말 같았다. 평생 잊지 못할 빛깔들이다. 동루이스다리를 건너는 것이 너무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놓칠 수 없어 매일 저녁 언덕으로 걸었다.


언덕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있는 수도원 같은 곳에서 와인을 가져가 마신 적도 있는데 술과 함께하니 더더욱 감격스러웠다. 유선이와 나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며 사진을 찍고 신이 나서 아무 말이나 껄껄 웃으며 했다. 해질 무렵에 그 근처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그 사람들과 관련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모르고 계실 테지만 우리의 웃음을 위해 희생되신 모든 분들께 사죄를 드리고 싶다.
이 날은 뜻밖의 행운도 있었다. 지는 해를 보며 와인 한 병을 비우고 내려오는데, 언덕 한 귀퉁이에서 와인 시음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2유로를 와인잔 보증금 명목으로 지불하면 포르투의 온갖 와이너리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행사였다. 신이 나서 와인을 와구와구 마셨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모르는 사람들과 시덥잖은 대화를 했다. 이때 유선의 유럽 생활 짬바를 느낄 수 있었는데, 나보다 먼저 유럽에 도착해 생활하고 있던 유선이가 서양인들의 특기인 스몰토크를 제대로 학습했다는 걸 확인했다. 난생처음 보는 강아지를 붙잡고 귀엽다고 칭찬을 막 하더니 그 강아지의 반려인 인스타그램까지 팔로우했다. 나는 반년 동안 유럽에서 지내도 학습하지 못한 스킬인데, 그는 이미 몇 달만에 통달했던 것이다.


포르투에서 세 밤을 자고 리스본 근교 도시에 갔다. 그곳에서도 버스를 타고 근처 여기저기에 갔다. 그 중에서도 해안에 있던 어떤 마을은 아직까지도 이름을 모르겠다. 유선이만 따라간 곳인데 정말 아름다웠다. 언덕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고 그 아래 해안가에서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언덕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점처럼 작게 보이는데 그게 너무 신기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다들 수영을 하길래 내려가서 발을 살짝 담갔는데 말도 안 되게 차가운 바다였다. 수영을 하던 사람들은 귀엽고 대단한 분들이었다.
이따가 다시 이 마을 이름을 유선이에게 물어봐야겠다. 또 까먹겠지만. 들을 때마다 까먹어도 알려주는 유선에게 크게 고맙다.

리스본에서는 포르투에서처럼 3박을 했다. 처음 리스본에 도착해 코메르시우 광장을 가자마자 '우와'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언덕 구비구비 타일 바른 건물들이 있다는 점에서는 포르투와 다르지 않았지만, 아주 너른 광장과 바다가 있었다.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말을 붙이는 잡상인들만 없었다면 더더욱 좋은 곳이었을 것 같다.

리스본에서는 별다른 일정이 있지 않았다. 유명한 에그타르트를 사먹으러 가거나, 지금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명소에 찾아갔다. 리스본에서는 건물 외벽에 붙은 타일과 가가호호 다른 테라스 모양을 많이 구경했다. 리스본이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인프라가 훌륭한 도시가 된다면 그곳에 살아보고 싶다. 리스본에 살면서 포르투에 종종 노을 여행을 떠나면 무척 좋을 것 같다.
리스본에서의 널널한 일정을 마치고서 유선이는 런던으로, 나는 마드리드로 되돌아갔다. 늦여름에 포르투갈 여행을 하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글에는 2019년 여름 포르투갈에서의 기억을 복기하고자 한 목적도 있지만, 유선에게 사죄를 올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신트라에서부터 유선이에게 무척 골을 질렀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예민하게 굴었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예민해지는 나를 리스본에서까지 견딘 유선에게 정말 미안하다. 서운하고 화가 났을 텐데도 별 내색 없이 여행을 끝까지 함께해줬다. 나의 존경스럽고 유쾌한 친구 유선에게 언제나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앞으로도 이런 류의 사과문을 많이 올리게 될 것 같다. 거의 여행에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이와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루트팍여행피해자모임의 인원이 상당한데 차근차근 사과를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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