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중순에 담양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동기들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담양에는 10년 만에 가보는 거였다. 10년 전 여름에는 장대비가 쏟아지던 때에 가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내내 쨍한 날씨여서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담양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훠얼-씬 멋진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맛없는 떡갈비를 먹고 죽녹원에 갔다. 맛없는 음식을 먹어서 뿔이 잔뜩 났는데, 죽녹원에 들어서니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종류 별로 크기 별로 대나무들이 가득이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좋았다. 조금 거짓말이다. 연두색 댓잎들이 너무 멋져서, 쭉 차분하진 못하고 종종 신나게 달렸다.

짐을 한가득이고 걷느라 땀이 왕창 났지만 주변이 온통 초록빛이어서 아무렴 좋았다. 계속해서 노래를 흥얼거리나 별 거 아닌 농담에 실컷 웃거나 했다. 죽녹원 한가운데 숨어있는 갤러리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도 하고 뜬금없이 나타난 정자에 앉아 쉬기도 했다. 특히 좋았던 곳은 출구 쪽에 있던 카페다. 널따란 한옥과 정자를 카페로 활용하는 곳이었다. 더운 바람을 맞으며 식혜와 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배가 아주 고파지기 전까지 그곳에 늘어져있었다.
택시를 타러 가는 길에 있는 정원에서도 다시 한번 감탄하며 빠져나왔다. 죽녹원은 어마어마하게 멋진 곳이다. 입구부터 출구까지 계속 볼거리가 가득했다.

택시를 타고 펜션으로 가 땀 흘린 몸을 씻고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한참의 고민 끝에 시내에 있는 어느 햄버거 가게에 가기로 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걸어갔다. 담양의 장점 첫 번째는 멋있는 숲과 나무가 많은 것, 두 번째는 도시가 작아 여기저기 걸어 다니거나 택시 타기에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시내가 나타날 때까지 관방제림을 따라 쭈욱 걸었는데 담양의 두 장점이 조화를 이루었다.

관방제림은 평탄한 길이 길게 나있고 나무가 그 길을 따라 그늘을 만들어둔 곳이다. 걸으며 벅찬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줄도 몰랐던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여름방학에 할머니 댁 근처를 노닐던 그때가 떠올랐다. 구경할 별 게 있는 건 아니지만 풍경 전체가 주는 느낌이 너무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걷다가 아주 귀여운 강아지도 만났는데 그날 딱 3분 정도 봤을 뿐인 그 강아지가 보고 싶다.


햄버거 집에 가서 햄버거 세트 하나씩을 먹고 술을 잔뜩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부어라 마셔라 마셨다. 이번엔 소윤이가 야광봉 수십 개를 가져왔는데, 흥 내기 달인 현호가 그에 부응해 야광봉을 몸에 두르고 테크토닉을 췄다. 사실 모두가 췄다. 난생처음 듣는 황보의 '뜨거워져'라는 노래였다. 현호의 언프리티 랩스타 성대모사와 그 누구도 모르는 썩은 K팝 가창은 볼 때마다 숨이 멎을 듯이 웃기다.

온갖 추문과 추궁, 그리고 비난과 고성이 난무한 술자리는 술이 떨어지자 마무리됐다. 대학교 1학년 때 잘못 들인 음주 문화가 모두가 학사를 받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아 참 걱정이다. 하지만 너무 웃겨서 또 좋다. 다음 날 힘겹게 일어났다. 그래도 예상보단 숙취가 강력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마 숲에서 좋은 공기를 많이 마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체크아웃을 하고서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기로 했다. 미리 준비를 마친 대원이와 나는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도 한 잔 때려먹었다. 카페테라스에서 베란다 프로젝트의 앨범을 틀어놓고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는데 아주 좋았다. 숲 냄새가 가끔씩 부는 바람에 훅- 하고 밀려오는데 천국 같았다(무교임).
준비를 마친 친구들과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고 순댓국 한 그릇씩 먹고 또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떠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번 담양 여행은 아주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여름의 단편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 같다. 계속 걷던 기억뿐인데 그게 마음에 아주 큰 면적으로 감겨있는 것 같다. 여름이 가기 전에 다녀와서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또 어느 여름에, 아니면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다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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