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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기억

꽃의 이름이 지나면 가을은 문을 열고, 9월 제주 여행

by 루트팍 2021. 9. 24.
꽃의 이름이 지난 하도리의 어느 해안가에서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멀리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이 자주 든다. 보통은 책 한 권을 챙겨 창덕궁 옆에 있는 프릳츠에 다녀오는 정도로 해결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걸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정민이가 제주도 여행을 기획 중이라길래 옳다쿠나 하고 제주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박 4일 동안 제주도에 머무르게 됐다.

김포공항 카페 빌라드샬롯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으로 갔다. 나는 한 시간보다도 훨씬 더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한다. 활주로가 보이는 곳에 앉아있기 위해서다. 수색대를 지나 직진하면 카페 빌라드샬롯이 있다. 올해 한 네 차례의 제주 여행 모두 이곳에서 시작했다. 널따란 창 앞에 좌석이 마련되어 있어 평화롭게 바깥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창밖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비행기, 잠시 쉬고 있는 비행기, 떠나는 비행기, 돌아오는 비행기 모두 있다. 커피를 마시며 활주로와 비행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놀러 온 기분이 든다.


들뜬 마음으로 퐁누나에게 문자도 했다. 혹시 쉬는 날이라면 식사라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침 퐁누나는 다음 날부터 서울에 와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하필 당일에 저녁식사 약속까지 있어 볼 시간이 없었으나 막간을 이용해 차라도 마시기로 했다. 급하게 차를 마실 약속을 잡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 잔잔하고 어둑한 바다를 찍었다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침 플랫폼에 대기 중인 101번 버스를 타고 세화리로 갔다. 세화리환승센터 정류장에 내리니 곧바로 퐁누나의 차가 와서 올라탔다. 시간이 늦어져 차를 마실 수는 없었고 함께 성산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호텔까지 가기로 했다. 퐁누나가 바쁜 와중에도 일부러 구불한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 구경을 시켜주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예쁜 바다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플레이스캠프 스탠다드룸 내부



플레이스캠프제주는 내가 작년부터 즐겨 찾는 호텔이다. 혼자 묵는 사람에게 아주 좋은 선택지인 곳. 감옥 같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되는 것 같지만 나는 아주 좋아한다. 나에게 유일한 단점은 복도의 소음이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뿐이다. 방의 구성도 컨디션도 좋고, 무엇보다 1층에 도렐이나 샤오츠처럼 맛있는 식음료가 준비되어 있어서 좋다.

토요일에 책모임이 있어 여행 내내 읽었다



도착하자마자 샤오츠에서 밥을 먹고 도렐에서 커피를 마셨다.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다가 스우파 본방사수를 했다. 집에서 하던 것들이지만 새하얗고 뽀송하고 바스락거리는 침구 위에서 하니 더 좋았다. 아주 편히 잠을 잤다.

택시 안에서 찍은 귀여운 밭과 늠름한 지미봉



일어나서 씻고 도렐에 가서 커피 한 잔을 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조금 더 앉아있다가 택시를 불러 평대리로 갔다. 톰톰카레에서 점심을 먹고 요요무문에서 커피를 마시는 전통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톰톰카레-요요무문 코스는 한동리나 평대리에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추천한다. 이 코스는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점심시간을 선물한다. 이제는 이 코스를 꼭 거쳐야만 '내가 지금 구좌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톰톰카레와 요요무문



오랜만에 콩카레를 먹었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요요무문에서는 서울에 있는 퐁누나의 원격 인심 덕에 비스코티와 휘낭시에도 처음 맛볼 수 있었다. 풍요롭고 차분한 점심시간을 가지고 책닦는남자북스테이로 갔다. 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담을 보며 쉴 수 있는 책닦는남자북스테이의 거실



어쩌다 보니 정말 오랜만에 오게 됐다. 하지만 언제 와도 몇 달만에 온 것처럼 편안한 곳이다. 두 사장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서 우럭매운탕을 먹으러 갔다. 항상 맛있다고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고 돌아와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책닦남 더블베드 객실 내부



더블베드가 있는 방에서는 처음 묵어보는데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뻗어도 침대가 끝나지 않아 너무 좋았다. 소파에 앉았다, 침대에 누웠다 하면서 그림책을 읽었다. 이곳에서 읽으려고 미리 그림책을 배송시켜뒀다. 안녕달 그림책은 [안녕]이 처음이었는데 아직도 그 그림들을 마음에 품고 산다. 이번에 읽은 다섯 권도 그랬다. 어떤 책은 펼치면서 올라간 입꼬리가 덮는 순간까지 내려오지 않기도 했고, 어떤 책은 읽는 내내 눈물을 머금고 있어야 했다. 포근한 책닦남에서 읽기 참 좋은 책들이었다.

눈물좔좔템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책닦는남자북스테이에 머무르게 된다면 안녕달 그림책 여섯 권 모두 읽으며 편히 쉬어가길!

책닦남 바로 앞 올레길에 있는 신비한 곳



그다음 날엔 친구 정민이가 왔다. 태풍 찬투가 관통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숙소 밖으로 돌아다니기도 어려운 날이었다. 사장님의 도움으로 겨우 식사를 해결하고서 숙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정민이가 제주에 온 첫날부터 심심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책닦남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즐겁게 숙소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책닦남의 밖은 무지하게 빠른 바람으로 요란스러웠고, 우린 작게 모여 앉아 조잘거리며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요요무문에서, 당근케이크와 바닐라라떼와 아메리카노



다음 날에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우리가 헤어지는 날이었다. 정민이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성산으로, 나는 다시 일상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전에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가 요요무문에 들어갔고, 마을길을 누비다가 평대스낵에 가서 떡볶이와 튀김을 사 먹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마을길을 누벼 책닦남에 가서 정민이는 짐을 챙겨 떠났다. 나는 아직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한참이 남아 조금 더 머무르다 가기로 했다.

하도리 별방진 위



사장님이 남은 시간 동안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그렇다면 밝아 보이는 남쪽으로 가자고 내가 다시 제안했다. 책닦는남자북스테이가 있는 한동리부터 종달리까지 차로 달렸다. 사장님은 내가 감탄하는 곳마다 차를 세워주었고, 나는 차가 서면 얼른 뛰쳐나가 사진을 찍었다. 하도리에 있는 별방진, 토끼섬 앞 작은 포구, 종달리 전망대에서는 사장님도 차에서 내려 함께 걸었다. 모두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제주도에서 운전을 하지 않아 하도리에서 종달리로 이어지는 해안으로 다닐 일이 좀처럼 없는데 그걸 잘 아시는 사장님이 귀한 구경을 시켜주셨다.

우도 위 하늘이 맑다



맑게 갠 하늘과 또렷이 보이는 우도, 그리고 성산일출봉을 보니 마음 속이 환히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동리로 방향을 틀어서 달리다가 구름 사이로 볕이 삐져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또다시 감탄했는데, 역시나 사장님이 부리나케 차를 세워주셨다. 너무너무 좋다고 계속 말하니 좋아서 다행이라고 말하셨다.

하도리 철새도래지



돌아와서는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선미누나가 지어주는 밥은 언제나 맛이 좋아 느리게 먹고 싶지만 101번 버스 시간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맛있는 닭갈비와 한치전, 그리고 바질 페스토를 바른 빵 한 조각을 해치우고 가방을 챙겼다. 다시 사장님의 차를 얻어 타고 101번 버스가 오는 정류장으로 갔다. 사장님과 나, 그리고 선미누나까지 버스가 오기 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도란도란 떠들었다. 반딧불이 이야기도 하고 한성대입구 근처 이야기도 했다. 제법 찬 바람이 불어 정말 가을이 왔다고 생각했다.

선미누나가 집에 가서 먹으라고 가방에 넣어준 감귤



버스에 올라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를 받았다. 가방에 러브레터를 넣어두었다는 선미누나의 메시지였다. 버스가 너무 어둑해 읽지 못하고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읽었다. 게이트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응원한다는 말이 정말 너무나도 큰 응원이 됐다.

내가 제주에 있는 동안 그곳을 지나간 태풍의 이름은 찬투다. 캄보디아에서 제출한 이름이고 꽃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것이 지나고 난 후엔 제주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올해 제주의 가을은 꽃의 이름으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