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복원된 기억

Q. 왜 나는 바르셀로나가 별로일까?

by 루트팍 2021. 1. 3.

바르셀로나에는 이제까지 두 번 가봤다. 2016년 5월에 7박 8일, 2020년 1월에 3박 4일.


학교를 다니기 위해 거주했던 마드리드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머무른 유럽 도시 중 하나다. 가장 오래 있던 곳은 프랑스 파리고 그다음이 바르셀로나다. 파리는 정말 좋아해서 많이 그리고 오래 있었던 것이 맞으나 바르셀로나는 아니다. 처음 7박 8일 여행을 하던 때는 가우디 씨가 이것저것 너무 뭘 많이 지어놓으셨길래, 그걸 다 보려면 오래 걸리겠다 싶어 일정을 길게 잡았다. 그다음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3박을 결정했다. 도시 이동을 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어느 도시든 최소로 머무는 기간을 그렇게 잡게 된 것 같다..

베를린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안. 엄청 오랜만에 창가에 앉았다.



내게 바르셀로나는 곧 사그라다파밀리아다.

처음 그곳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인터넷에서 후기를 찾아보다가 누가 숲에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길래 콧방구를 뿡뿡 뀌었었는데, 직접 내부에 들어가서 곧바로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달아 당황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걸음을 계속 옮기면서 '우와.... 우와........' 했다. 공간이 주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모든 요소에 디테일들이 잔뜩 있어서 하나하나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진짜로 주 선생님, 마리아 선생님 모두 모실 뻔했다. 매일 내가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 저기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실 작정이다. 유럽에서 들어간 어느 성당에서도 이런 포근함은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가우디 씨 감사합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도 '우와...' 하며 놀랐는데 4년 동안 입장료가 아주 많이 올라서 놀랐다. 아마 26유로 정도를 낸 것 같은데 당황해서 학생 요금이 맞는지 여러 차례 확인했다. 이전의 감동은 없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이드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하는 빛을 오래 지켜봤다. 완공 후에 무료로 개방된다고 하니 그때 일주일쯤 머무르며 매일 이곳에 들를 수 있으면 좋겠다.

사그라다파밀리아의 내부



사그리다파밀리아의 외부에서 받는 느낌은 내부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실 약간 무섭다. 온갖 성경 속 인물과 이야기들이 벽면에 조각되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내용을 당최 모르니 너무 자세하고 빼곡한 그 조각들이 무서웠다. 여행객들이 팔짱을 끼고 이 코너 저 코너에서 조각들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로 봐서 벽면 전체가 대서사 임에 틀림이 없다. 시간이 조금 지난 벽면의 경우에 부식이 일어나서인지 거뭇거뭇하게 변색이 돼있는데, 그게 신과 함께의 나태지옥, 살인지옥 어쩌구처럼 보여서 살짝 오싹했다. 어찌나 자세하게 깎아놓았는지 표정도 다 살아있다.

아무리 무서워도 경이로운 건 어쩔 수 없다.
4년 만에 찾아오니 한쪽 면은 완성되어 있었고, 나머지도 전보다 많이 진전된 것 같았다. 이렇게 커다랗고 공이 들어간 건물이 100년씩 지어지는 걸 본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온통 유리로 덮은 을지로 하나은행 빌딩이 완성되어가는 것만 봐도 신기했는데 이런 건물의 완성과 함께하면 진짜 경외롭고 벅찰 것 같다.

위 - 2016년 5월 / 아래 - 2020년 1월




사그라다파밀리아 다음으로 멋있는 것을 하나 더 꼽으라 하면 구엘 공원을 택하겠다.

이곳도 사그라다파밀리아만큼이나 온갖 디테일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파도와 어쩌구저쩌구 많은 것들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공간 별로 다른 느낌을 풍기기 때문에 이곳저곳 누비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바르셀로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것도 아주 편안하고 아름다운 타일덕지덕지벤치에 앉아서.


2016년의 구엘공원



이렇게 멋진 건축물들이 있는 바르셀로나이지만, 언제나 별로인 여행지를 고르라면 바르셀로나를 고른다.

가우디의 건축물을 둘러본 것 외에 달리 기억할 만한 것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클럽들이 아주 유명한데 내가 클럽입뺀남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또 클럽은 기도형들이 무서워 근처에 얼씬도 못했지만, 바르셀로나 여러 곳들이 클럽처럼 붐빈다. 까딸루냐 광장, 람블라스 거리, 바르셀로네타 해변 등 어딜 가나 사람들이 가득이다. 혼자 유유자적 있기에 적절한 도시가 아닌데 내가 기어코 혼자서 다녀서 진가를 아직까지 모르는 것 같기도. 뭐 여튼 어느 이유에서든 별로인 곳을 굳이 고르라 하면 항시 첫 번째로 바르셀로나가 떠오른다.

저 멀리 사그라다파밀리아를 바라보는 미슐랭타이어. 준범이가 찍어줌



그래도 작년에는 오랜 인연과 함께하는 뜻밖의 시간도 있었다.
초중고 동창 준파인더(그의 유튜브 채널명)와 벙커에도 가고 밥도 먹었다. 졸업 후에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인스타 친구 상태였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만나기 직전까지도 낯을 가릴까 겁을 잔뜩 먹었는데 준파인더가 글로벌 인재답게 살갑게 대해줘서 편안했다. 비슷한 시기에 준파인더는 세계여행을 시작하고 나는 마드리드 살이를 시작해 이것저것 떠들 것도 많았다. 벙커는 준파인더가 아니었다면 가볼 생각도 못했을 곳인데 매우 운치 있고 풍경도 좋았다. 그곳에서 아주 오랜만에 내가 등장하는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다음날인가 다다음날에 아시안 뷔페에 함께 가서 배가 찢어지기 직전까지 밥을 먹으며 깔깔대기도 했다. 2016년과 같이 바르셀로나에 실망만 하다가 떠날 뻔한 나를 구제해주어 고맙다. 내 이야기에 많이 웃어준 것도 너무 고맙다.

벙커에서 찍은 야경과 실루엣



다음에 갔을 때는 좋아하는 도시로 바뀌길 기대한다. 그때까지 너도 나도 무사하자 르셀로나야~
근데 다 쓰고 나니까 그렇게 별로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재방문 후 다시 입장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