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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하루의 면면

참으로 재미난 하루를 보냈다

by 루트팍 2020. 9. 20.

 

장보러 홈플러스익스프레스 가는 길에 본 하늘

 

주님에게는 고난 주간이 있고 내겐 집들이 주간이 있다.

지난주엔 14학번 동기들과 집들이를 했고, 어제는 북리뷰 회원들과 했다. 그 전엔 부천 친구들과도 했다. 사실 집들이라는 이름이 참 머쓱하다. 일단 이 집은 2018년 여름부터 2019년 여름까지 내가 살았던 집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왔다 갔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이미 익숙한 집이지만 다들 처음 와본 척을 하며 집들이 분위기를 살려줬다.

 

 

그리고 하나 더 머쓱한 점은 이 집은 6평짜리 원룸이다. 집에 들어와서 다섯 걸음이면 이 집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집의 끝부터 끝까지 아홉 걸음이면 충분하다. 짜잔! 하고 집을 공개하고 싶은데 고개를 파노라마처럼 돌리면 집 투어가 끝나서 머쓱하다. 처음 이 집에 온 친구에겐 괜히 머쓱해서 "너 지급 우리 집 다 본 거야."하고 말한다. 친구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괜히 그런다. 

 

 

 

 

연태고량주+맥주. 선아가 오기 전 고맥 한잔 하며 담소.

 

 

북리뷰 회원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승민이와 소현이를 만나 먼저 장을 보고 집으로 왔다. 술을 바리바리 싸들고 걸으니 MT 가는 기분이 들어서 신났다. 짐을 정리하다 보니 지영이가 왔고 선아는 아주 늦게 왔다. 이 집에 오기까지의 행적을 마구 추궁했으나 답은 들을 수 없었다. 묻는 말엔 대답을 하지 않고 대뜸 무릎을 꿇더니 알아서 엽떡을 방문포장 해오겠다고 했다. 아마 첫 잔을 마시고 있었으나 선아에게는 우린 이미 잔뜩 취했다고 뻥을 치고 고맥 원샷을 강요했다. 

 

북리뷰는 '북섹금(북리뷰 내 섹스 금지)' 원칙만 지킨다면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술 강요는 21세기에 매우 부적절하고 자칫하면 징역을 갈 수 있는 일이지만, 이 모임 내에서는 허용된다. 잔뜩 취해 기억도 못할 말들을 하고, 서로가 먼저 집에 가지 말라고 무릎 꿇고 빌기도 한다. 2년 가까이 해왔지만 변함없이 난장판 술자리를 유지한다는 점이 이 모임의 특징이기도 하다.

 

 

 

서로가 써온 글을 읽고서 답글을 쓰는 친구들

 

 

우리는 북리뷰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거다.

북리뷰의 난폭한 술자리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이 자주 나돌자 의혹이 쏟아졌다. 책을 읽는 것이 정말 맞냐? 요즘은 술을 북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문화가 생긴 거냐? 술 마시고 싶으면 책 급하게 읽어서 만나는 거냐? 등. 북리뷰를 향한 의혹들이 전부 딱 잘라 거짓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우린 북리뷰다. 책을 읽고 아주 진지하게 얘기하고 웃고 떠든다. 아무리 와구와구 술을 마셔도 술 마시면서도 책에 나온 얘기들을 곧잘 한다.

 

 

 

글도 답글도 너무 웃기다

 

 

 

하지만 이 날은 책을 읽고 만나지는 않았다. 급하게 만들어낸 집들이 행사였기 때문에 책 한 권을 읽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각자 아무 글이나 아무 분량으로 써오기로 했다. 나는 북리뷰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선아는 사랑의 경계를, 승민이는 살아가는 태도를, 지영이는 서울을 동경하는 마음을, 소현이의 주호민이 얼마나 개소리를 했는지를 썼다. 서로가 쓴 글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아주아주 재밌었다. 앞으로도 종종 하고 싶어졌다. 이것을 끝내고 우리는 오전 다섯 시까지 술을 아주 많이많이 마셨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무수한 빈병을 바라보니 뿌듯해서 가슴이 뻐렁쳤다.

 

 

 

소현이가 선물해준 고수 화분. 발아하도록 하는 것부터 내 책임이다. 그리고 집을 다 치웠는데도 안 일어나는 사지영

 

 

아침에 일어나서 난장판을 정리하고 고수 씨앗을 심었다.

소현이가 고수를 키우라고 선물해줬다. 같이 음식을 먹을 때 못 넣게 하더니 키워 혼자 먹으라고 선물했다. 화분에 적신 흙을 넣고 씨앗을 심고 다시 물을 줬다. 흙과 씨앗일 뿐인데도 생기를 준다. 꼭 발아해서 나와 함께 살아줬으면 좋겠다. 지금도 너무 귀여운데 발아하면 더 귀여울 것 같다. 이걸 키우는 데에 성공하면 다른 화분들도 들여오고 싶다. 청소, 빨래에 이어 식물 가꾸기까지 일과에 포함된다면 훨씬 윤택한 삶이 될 것 같다. 지금도 괜히 해를 받는 화분을 내려다보고 왔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뭐가 옹기종기 많이 있는 흙

 

 

화분을 채워놓고 음악을 틀었는데도 지영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지영이는 아침에 잠깐 깨어나 떠들다가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중간에 잠깐 깨서는 마라탕을 주문하라고 윽박을 지르고 다시 잤다. 마라탕이 도착하니 와구와구 잘도 먹었다. 다 먹고서 마구 떠들다보니 오후 한 시가 되었다. 친구들이 슬슬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가지 않아서 나가라고 윽박을 질렀다. 윽박을 들은 소현이는 당황했는지 이다도시 씨처럼 말을 했다. 그게 너무 웃겨서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덕분에 원래 있던 나의 웃음 버튼 '씨 없는 수박 우장춘', '프로바이오틱스 여에스더'에 '이다도시'가 추가되었다. 이 사람들 이름만 들어도 너무 웃기다.

 

집에서 조금 더 쉬다가 또다른 북리뷰에 나갔다. 이 북리뷰 친구들이 '바람피우는 북리뷰'라고 부르는 북리뷰다. 정근이가 초대해줘서 들어가게 된 북리뷰다. 책을 다 읽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라고 해서 좋았다. 다들 책이 너무 어려웠고 서로의 얼굴이나 보자고 나왔다. 책을 읽는 과정이 지난해서 고통스러웠는데 같이 다 같이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다 읽어온 사람의 지식을 훔쳐가려고 했던 계획 했는데, 다들 나와 같아서 빈집에 도둑 네 명이 들어온 꼴이 됐다. 도둑들끼리 아주 재밌게 얘기했다.

 

 

신촌 유플렉스 11층에서 먹은 샐러드

 

북리뷰가 끝나고 정근이와 놀았다.

정근이와 함께 나를 괴롭게 한 책을 알라딘에 가서 처분하러 갔다. 책을 팔고서 다음에 리뷰할 책을 발견했다. 한 권이 있길래 정근이가 우선 사고 나는 대학로점에 있는 재고를 사기로 했다. 알라딘을 한참 구경하고 밥을 먹으러 갔다. 정근이가 높은 곳에 가서 밥을 먹고 싶다고 해 신촌 유플렉스 11층에 가서 밥을 먹었다. 둘 다 샐러드를 사먹었다. 처음 한입을 씹고 둘이 한참 웃었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맛있는 샐러드였고 그게 너무 웃겨서 "이거 왜 맛있지?"를 연신 말하며 웃었다. 해 질 녘에 노을을 보며 밥을 먹으니 아주 좋았다. 다음에는 이곳에 있는 다른 자리에 앉아 밥을 먹어보기로 했다.

 

밥을 다 먹고 12층에 있는 아크앤북을 한참 구경하고서 정근이와 헤어졌다. 알라딘 대학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집까지 걸어갔다. 바람이 너무 시원해 땀이 나는 대로 말랐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도 즐겁고 날씨도 시원해서 좋았다. 이런 하루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