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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하루의 면면

2021 SS 잇-템, 종로구 도보 여행

by 루트팍 2021. 1. 19.

 

연기가 피어나는 서울대학교병원의 어느 굴뚝

 

내겐 계획하기를 즐겨하는 친구가 둘 있다.  태형이와 륜형이다. 둘은 아주 분주하게 계획을 꾸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결이 좀 다르다.

 

태형이는 모든 행사를 꼼꼼히 계획하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저번 주에 내 자취방에 와서 오돌뼈를 먹는 일까지도 철저한 계획 수립 단계를 거쳤다. 여행은 말해 뭐해. 모든 행사에 진심을 다해 꼼꼼하게 계획을 짠다. 이와 달리 륜형이는 거룩한 계획을 주로 한다. 이를테면 '(가칭) 완벽한 대학생활 4년', '(가칭) 어떻게 영어의 신이 될 것인가' 같은 것들이다.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포부와 계획을 펼치는 것을 자주 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계획하는 것을 무척 즐기는 것에 비해 꽤나 충동적이다. 어제는 뜬금없이 자신이 우리(네? 저는 왜요?)의 영어 공부 계획을 짰다며 바로 오늘부터 그 일정이 시작이라고 말하곤 끊었다. 존나 당황스러웠다. 이미 약속 장소까지 정해 놓은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뷰가 아주 멋있는 카페. 사직단 앞에 있다.

 

 

오전 11시경, 지가 약속 장소와 시간까지 정해서 거의 통보를 해놓고서는 이발을 한다며 먼저 가있으라고 했다. 갔는데 Covid-19으로 휴무를 한단다. 여기서 그의 분주한 계획의 특징이 돋보인다. 뭔가 엉성하다. 이 새끼 사람을 문 닫은 카페로 불러내 놓고 이발하느라 전화도 안 받는다. 그래서 경복궁 근처를 배회하며 사람 없는 카페를 찾아 헤맸다. 사직로 뒷골목으로 걷는데 오늘따라 국세청과 연합뉴스 건물이 핵간지 나 보여서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멀리 트윈타워, 연합뉴스, 국세청

 

뒤늦게 도착해 자신이 설계한 영어 공부법을 설명하더니 바로 실행에 옮겼다. 나는 의견을 낸 적도 동의를 한 적도 없지만 이미 그의 계획 아래에 있는 인물이었기에 속절없이 동조했다. 미국의 2021년 경기부양책을 설명한 기사 두 개를 읽었는데 영어도 상식도 느는 기분이라 좋았다. 엉성하고 괴팍하지만 좋은 계획이었다. 굶고 오는 것 또한 그의 계획 중 하나였는데 거사를 끝낸 오후 3시쯤이 되자 돌아가실 지경이었고, 밥을 먹기로 했다.

 

광화문미진을 향해 걷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모습을 바꾸는 광화문 광장이 너무 신기했다. 

 

광장을 3분의 1쯤 들어냈다. 빨리 새롭게 완성된 광장을 보고싶다.

 

KT 쯤 지나는데 뜬금없이 뷔페 얘기를 하게 되었고 광화문미진까지 50m를 남겨둔 채 행선지를 변경했다. 종로타워에 있는 애슐리에 갔다. 둘 다 너무 오랜만에 애슐리에 가는 거였고 중등교육을 받던 시절의 애슐리 썰 이것저것을 나눴다. 분명히 첫 번째 접시까지 아주 즐거웠는데 세 번째 접시가 되자 둘 다 기분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뷔페 국룰인 것 같다. 세 접시를 초과하면 눈 앞의 음식을 집어던지고 싶어 지고 애먼 망고(혹은 파인애플)만 주워 먹게 되는 복잡한 심경. 분명히 즐거운 식사자리였는데 급작스럽게 모두가 우울해지는 그 처절한 상황.

 

서둘러 광화문까지 다시 걷다가 급하게 헤어졌다. 우애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면, 친구와 뷔페 따윈 방문하지 않는 게 좋겠다.

 

공평동과 서린동의 여러 빌딩들

 

 

 

그대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토를 할까 염려가 되어 걸었다. 그러길 잘했다 싶었다. 오늘 해가 지는 풍경이 빌딩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원래도 경복궁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을 지나 혜화로터리까지 이어지는 길을 참 좋아하는데, 멋진 색까지 덧입혀 벅찬 마음이 들었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걸었는데 졸라 웃겨서 깔깔 웃으며 걸었다. <영혼의 노숙자> 158화 너무 웃기다. 방금 정근이에게도 추천했는데 웃기다고 해서 뿌듯하다.

 

 

현대 빌딩과 일본문화원

 

 

슬슬 발갛게 물들던 하늘이 안국역을 지날 쯤부터 아주 진하게 물들었다. 일본문화원의 에메랄드 빛깔이 하늘과 너무 잘 어울려 한참 서서 사진을 찍었다. 드높은 현대건설 건물보다 일본문화원이 훨씬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뜬금없이 누군가 내게 현대 빌딩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은 얘기를 한 것이 떠올랐다.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어 건너편 길에 꼭 붙어 걸었다.

 

 

창경궁 홍화문과 담벼락, 그리고 나무들

 

 

창경궁을 지날 무렵부터 발가락이 아팠다. 오늘 신은 컨버스 신발은 오래 걸으면 땀이 차올라 뽁뽁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통증이 시작된다. 그래서 오늘은 딱 혜화동로터리까지만 걷고 집에 가기로 했다. 원래는 한성대까지 걷거나, 아니면 아예 미아동 집까지 걸어가곤 한다. 그러면 '종로구와 성북구, 그리고 강북구를 가로지르는 도보 여행'이라는 다소 번잡스러운 이름이 될 뻔했으나 마침 종로구에서 끝났다.

 

 

오늘은 종로구 도보 여행을 했다.

 

혜화동로터리에서 바라본 남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