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효연이가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효연이가 새집을 구해 그곳으로 주소지를 옮긴 건 맞는데, 이사는 나, 대원, 혁이 하게 됐다. 지금 막 이직한 회사에서 미어캣으로 활동하는 효연에게는 연차가 없다. 하지만 백수 친구는 많다. 그중 뉴효연하우스에서 접근성이 가장 높은 우리가 이사 대행으로 채택됐다. 오늘도 어제처럼 맑았고 날이 아주 따뜻하기까지 해서 산뜻한 마음으로 달려갔다.
먼저 가있던 혁이 보내준 주소로 가는데, 집까지 가는 길이 골목 안쪽이긴 하지만 길도 넓고 여성안심귀갓길이기도 해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뉴효연하우스에 대한 기대감을 대원이와 떠들었다. 6층으로 올라가 효연하우스로 들어갔는데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다. 분명히 효연이가 넓은 집으로 이사 간다고 했는데 이상했다. 심지어 낯익기까지 해서 혁에게 물어보았다. 네? 내가 도착한 곳이 구효연하우스란다. 나는 그 집에서 잠을 자고 온 적이 있다. 다만 만취 of 만취 상태로 갔기 때문에 기억이 흐릿했다. 그 집에 대해 가진 기억은 숙취에 절어 출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미아동 우리 집까지 괴롭게 버스를 타고 온 것뿐이다. 새집인 줄로만 알고 가는 길과 건물 그리고 분리수거장 등 온갖 걸 품평했는데 내가 두 발로(혹은 네 발로) 걸어 들어온 곳이었다ㅎ - 음주는 백해무익합니다. 하지 마세요. -
사전에 전달 받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임무는 우리는 구하우스에서 포장된 물건을 새집에 풀어놓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반포장 이사라고 했다. 그런 줄 알고 집을 구경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자꾸 일을 시켰다. '거기 거기 좀 잡아봐', '응, 그쪽으로 들어.' 등 너무 자연스럽고 세세한 디렉을 주셨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사라는 과정을 처음 겪어보는 거라 재밌기도 해서 그 아저씨에게 고용된 인부처럼 자연스럽게 일했다.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냐고 물으시기에 백수라고 말씀드렸더니 취업 응원까지 해주셔서 즐겁게 끝마쳤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반포장 이사라기보다는 반의반 포장이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약속된 돈을 다 받아가셔서 약간 의아하긴 했다.


새집에 짐을 다 풀고, 간단한 청소까지 마치고 냉면을 먹으러 갔다.
이번 겨울 처음 먹는 평양냉면이었다. 너무 설레 충무로역에서부터 달려갔다. 그나마 최근에 먹은 냉면은 능라도와 을밀대였고 필동면옥은 정말정말 오랜만이었다. 잰걸음을 하는데 필동면옥 건물의 곡면을 발견한 순간부터 입 안에 제육장 맛이 싸-악 돌아 미칠 지경이었다. 건물 사진도 멋지게 찍고 싶었는데 마음이 너무 급해 대충 찍을 수밖에 없었다.
효연이 고생한 우릴 위해 카드를 남겼고, 그것은 제육과 만두까지 시킬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냉면과 수육제육반반과 만두 모두 시켜 하나씩 입에 넣는데 3년 전 한동안 필동면옥 냉면을 자주 먹던 때가 절로 회상됐다. 연신 '맛있다!' '맛있다!'를 외며 먹어치웠다. 특히 제육이 맛있었는데 한 점 넣자마자 크게 감동했다. 추가한 냉면 육수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우니 오한이 들어 벌벌 떨었지만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오늘은 비건 지향 자아는 오늘 잠시 내려놓고 내일부터 빡세게 나아가기로 했다. 와중에 어쭙잖게 환경 보호 비슷한 게 하고 싶어 무절임과 배추김치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환경 절대 지켜)

문제는 계산 과정에서 일어났다.
혁이 효연의 어피치 카카오뱅크 체크카드를 이용한 결제를 맡았다. 바깥에서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 혁이 나오지 않아 유리문으로 들여다봤다. 난감한 얼굴로 결제를 마친 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연유로 그러냐고 물으니 효연의 카드가 도난카드였다고 말했다. 필동면옥을 가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계산을 해주시는 선생님의 카리스마가 상당하다. 그분이 효연의 핑키핑키한 카드를 들고 의심 가득한 얼굴로 도난 카드라는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나였으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을 테지만 혁은 의연하게 자신의 카드로 대처했다. 7만 4천원이 계좌에 있는 백수라니... 혁이 존경스러웠다.
나는 오늘 통장 잔고가 3만 7백원 가량이었는데 내가 결제를 맡았다면 이미 중부경찰서로 이송되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평냉장발장으로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징역을 가서 같은 방 수감자가 '어떻게 왔어요?'라고 하면 '평양냉면 값을 안 냈어요.'라고 말하게 될테고 그러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이 사건으로 구속된다면 구치소에서 이재용 다음으로 유명해질 것 같았다. 노임을 도난카드로 지불한 효연에게 분노가 일었다. 괘씸한 그를 응징하기 위해 후지불을 요구하기로 하고 와플과 커피까지 때려먹었다.



배가 불러 조금 걷기로 했다.
명동 성당에 들렀다. 저녁엔 처음 와보는데 절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오래된 종교시설이 주는 차분함이 너무 좋았고 내친김에 조계사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걸어가는 길에 시간을 확인하니 마침 여섯 시였고, 퇴근하는 효연을 만나기 위해 시청 광장으로 행선지를 변경했다. 효연이는 만나자마자 우리의 징역 갈 뻔한 상황에 대해 사과했다. 그의 석고대죄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마라탕을 먹으러 갔다. 네?
효연의 돈으로 늦은 점심, 디저트, 저녁까지 한큐에 해결했다. 이 정도면 징역살이의 위협을 준 사람이라도 봐줄 만 했다. 마라탕까지 먹고 혁과 효연은 지하철을 타러, 나와 대원은 버스를 타러 갔다. 대원과 안국역까지 걷기로 해서 조계사까지 들를 수 있었다. 절을 한 바퀴 돌고 향을 피워 기도를 올렸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징역살이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었다.


'용두사미 > 하루의 면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까치까치 설날은 체험 삶의 현장 (0) | 2021.02.14 |
---|---|
고향집에 다녀왔다 (3) | 2021.01.26 |
2021 SS 잇-템, 종로구 도보 여행 (5) | 2021.01.19 |
이틀 간 밀키트로 밥을 해 먹었다 (2) | 2021.01.14 |
기다란 무기력을 건너 (0) | 2020.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