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동안 밀키트를 조리해 식사를 해결했다.
메뉴는 얼큰 소고기 샤브샤브와 여향 소고기 볶음이다. 이름만 봐도 아주 맛있게 생겼는데 나도 이름에 혹해서 샀다. 또 첫 구매 시엔 40% 할인을 받을 수 있다기에 냉큼 샀다. 기대감에 부풀어 친구들에게 구매 내역을 캡처해 자랑을 했다. 그러고서 바로 아차 싶었는데, 나의 비건 도전기를 내 손으로 내가 조졌기 때문이다.
약 한 달 전부터 육고기 중에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닭고기만 섭취하겠다는 다짐 및 선언을 했다. 가공육은 예외로 한다는 괴상한 원칙도 만들었다. 이렇게 먹을 거 다 먹고 생각하니 이건 뭐 얼마 전 통과된 반쪽짜리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랑 다를 게 없다.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든 육고기를 점점 줄여나가겠다는 다짐에는 변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기든 채소든 한 번에 많이 먹어치우는 버릇부터 버리도록 하려고 한다. 부디 주둥이에코, 주둥이비건 짓거리를 그만하게 도와주세요 주님.

밀키트는 이렇게 배달이 왔다.
처음에 엄청난 부피에 깜짝 놀랐다. 밀키트는 이름부터 뭔가 귀엽고 자그마할 것만 같은데 고등어 사십 손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스티로폼에 배달이 왔다. 이미 비건지향 자아가 생채기를 입었는데 거기에 에코프랜들리 자아까지 싸늘해지는 순간이었다. 물로만 채운 아이스팩이 아니었다면 목놓아 울었을 각이다. 수많은 포장재에 둘러싸여 배달됐다는 건 내가 그만큼 편할 거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편했다.

얼큰 소고기 샤브샤브는 어제 점저와 오늘 점심에 걸쳐 먹었다.
순서에 맞게 소분된 재료를 때려넣어 끓이면 됐다. 국물이 끓을 때부터 이 조리가 성공적이라는 예감이 왔다. 아주아주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음식점에 들어가 메뉴를 둘러보기도 전에 '아........ 배고파!!!!!!!!'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냄새와 비슷했다. 고기를 넣지 않고 이대로 국물만 퍼먹어도 맛있겠다 싶은 냄새였다.
그리고 냄새만큼 맛도 좋았다.
쿡킷 어플에서는 배송 단계 이전에 재료가 준비 중이라는 단계를 표시한다. 왜 굳이 이런 걸 알려주나 싶었는데 이해가 됐다. 채소가 무지 신선했다. 조리 단계가 같은 채소들은 한 봉지에 함께 담겨있는데 무르거나 물이 생기지 않고 빛깔도 고왔다. 그것이 맛이 좋은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다진 마늘과 소스가 듬뿍 들어가는데 그것들의 맛과 향도 아주 좋다. 샤브샤브니까 곧장 건져야 할 것 같아 선 채로 허버허버 먹었다. 생칼국수도 300g 같이 배송이 오는데 한 번에 먹기에 너무 많아 국물을 소분해 두 차례 나누어 먹었다. 짜고 매운 국물에 칼국수는 언제나 아주 맛있다.

오늘은 어향 소고기 볶음을 해 먹었다.
일단 어제와 달리 재료의 수와 요리 전 준비 단계와 조리 단계가 대폭 늘어 당황스러웠다. 고기는 밑간을 하고 전분과 계란 흰자에 무쳐 재워둬야 했다. 그리고서 고기를 먼저 볶아내고, 따로 채소와 소스를 볶은 후에 볶아놓은 고기와 다시 볶는 과정이었다. 네??? 이렇게 써놓으니 간단해서 머쓱하긴 한데 단박에 때려놓고 끓인 샤브샤브가 비교의 대상이다. 중간에 고기를 볶는데 프라이팬 바닥에 자꾸만 전분과 계란이 눌어 성가셨다. 긁어내서 무심결에 입으로 가져갔는데 (feat. 돼지가 된 이유) 이까짓 게 뭐라고 맛있어서 짜증 났다. 바삭!정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여자 저차 바쁘게 두 손과 입을 이용해 완성했다. 밀키트니까 귀찮은 과정 없이 꽁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배신이다.
그래도 맛은 배신하지 않았다.
소스와 채소를 볶아낼 때 내가 원하던 맛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름지고 맵싹 하고 강렬한 중국풍을 기대했는데 평범한 볶음요리의 향이 났다. 중국 요리를 못 먹은 지 오래라 그것을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그럼에도 맛이 아주 좋았다. 밥에 얹어서도 먹고 깻잎에 싸서도 먹었다. 밥도둑 재질이긴 하나 새벽 1시에 요리를 완성했기 때문에 도둑질을 한 공기만 했다. 남은 걸로 내일 점심에 도둑질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덕분에 이틀 동안 배달음식 없이 잘해 먹었다. 하지만 한동안 시켜먹지 않을 예정이다.
지난번 프레시지의 밀키트의 맛에 받은 상처를 이번 밀키트는 치료 해줬다. 두 메뉴 모두 맛에는 손색이 없다. 그치만 이 맛보다 내 비건지향 자아와 에코프랜들리 자아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시켜먹지 않으려고 한다. 40%라는 엄청난 할인율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만족스럽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원래 가격 샤브샤브25,800원, 소고기볶음24,800원). 그러니 엉성하게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다가 탄성이 나오도록 맛있는 외식을 하는 패턴을 다시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다시 몇 번이고 바사삭 부스러질 테지만 여하튼 지금은 굳건하다(다짐만 1억5천2백만 번째). 이 다짐과 함께 괜히 요기요 슈퍼클럽도 탈퇴했다.
항상 글쓰기에 비장해 애를 먹어 놓고도 비건 다짐, 에코 다짐에는 비장하다. 비장하면 좆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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