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통 무기력에 종지부를 찍는다며 하는 의례가 있다. 여행이다. 이번엔 홍콩에 다녀왔다. 홍콩에 엄청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다.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표가 너무 쌌고, 무엇보다 에바항공의 B787을 두 번 모두 타고 돌아오는 선택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5월에 방콕에 다녀오며 에바항공의 로얄로렐에 크게 감격했다. 원래 처음으로 비즈니스 클래스에 탑승한 것에 감격한 것인 줄 알았다. 방콕에서 타이베이로 에바항공 B787에 탑승하고, 다음으로 타이베이에서 인천은 아시아나 B777에 탑승하고서야 깨달았다. 그냥 비즈니스 클래스가 아니라 에비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탑승에 감격했다.

아시아나 비즈니스 탑승 경험이 나쁘거나 별로라서가 아니다. 정말 에바항공 로얄로렐이 개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비교군이 아시아나의 아주 낡은 비즈니스 스마티움 좌석이라 더 좋게 느껴진 것도 맞긴 하다. B787 드림라이너의 하드웨어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아시아나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서비스는 아시아나에서 한국말로 한국인에게 세심한 응대를 받는 것만큼이나 만족스러웠다.

하여 5월에 인천으로 돌아오며 생긴 가장 큰 욕망은 에바항공 비즈니스를 다시 타는 것이었다. 그러다 9월 어느 날 홍콩을 오가는 비행기가 아주 저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은 마일을 모두 털어 홍콩-타이베이, 타이베이-인천 구간을 비즈니스로 예약하고서 7만원짜리 출국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5월에 방콕에 갈 때처럼 당장 짐을 챙겨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밤비행기까지의 긴시간을 라운지에서 보내다가 홍콩으로 갔고 재미난 3박4일을 보냈다. 홍콩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으나 홍콩은 타이베이보다 더 빌딩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도시였으므로 충분히 재미있었다. 음식이 입에 맞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주문한 음식 대부분을 남기고 나오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홍콩은 고개를 올려 눈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만으로 충분한 재미가 있는 곳이었다.

귀국하는 전날부터 태풍으로 버스가 다니지 않아 어찌저찌 공항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너무 좋았다. 지난 번에 인천으로 돌아올 때 이용하지 못했던 라운지를 이용할 생각에 신이 났다.

홍콩국제공항에 있는 실버크리스 라운지 개짱이다. 라운지를 둘러보지도 않고 음식이 놓인 섹션 바로 앞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음식의 맛이 개짱이라서 라운지에 별 다섯 개를 주고 싶다. 락사 한 그릇과 음식 두 그릇을 재빠르게 비웠다. 기내식을 먹을 생각에 조금 참았는데 그러지 말걸 그랬다. 기내식 메뉴는 기억 조차 나지 않고 실버크리스 음식이 맛있었단 느낌만 남아있다.

홍콩에서 타이베이 구간은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속도로 기내 서비스가 전개된다. 풀플랫으로 누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샴페인 석 잔과 기내식을 먹으니 비행이 끝났다. 화장실 조차 가지 않았다. 내리기 전에 주스도 한 잔 마셨는데 이름이 너무 길어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맛있었다.

고대하던 여정의 첫 구간은 맛있단 기억만으로 너무 만족스러웠다. 구슬픈 아델의 앨범 ‘30’을 연거푸 재생하면서도 맛있고 신났다. 이대로 끝이었다면 아쉬었겠지만 다음 구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마냥 신날 수 있었다.

23시간 레이오버 하는 일정이라 타이베이에서도 1박을 했다. 공항에서 급하게 싼 호텔을 예약하느라 시먼의 어느 모텔 같은 호텔에 묵게 됐다. 너무 찝찝했지만 시먼 몇 바퀴를 돌며 땀을 쫙 뺐더니 게의치 않고 잠들 수 있었다. 아종면선과 같은 건물에 있는 호텔이라 아침산책 후에 곱창국수를 때려먹을 수도 있었다. 꽤 괜찮는 호….모텔일지도?

체크아웃 전까지 낮잠을 때리고 다시 공항으로 갔다. 타오위안의 인피니티 라운지는 쉬기에 좋았고 아이스크림이 특히 맛잇었다. 이곳의 뫼벤픽이 실버크리스에 있던 하겐다즈보다 훠얼씬 맛있었다. 음식은 인상적이지 않았으나 아이스크림으로 용서됐다. 차가 들어있는 여러 팩, 캔 음료를 마시는 재미도 있었다.

타이베이에서 인천으로 오는 BR160편은 B787-10기종이었던 것 같은데, 홍콩에서 타이베이로 가는 B787-9보다는 좁았지만 아늑했다. 웰컴드링크로 내어준 화이트와인이 맛이 없었고 버터를 더 달라고 했다가 없어서 5억8천 번의 사과를 받았던 기억이 남는다. 빵이랑 버터가 맛있어서 더 먹으려던 거였는데 안 먹어도 그만이어서 머쓱했다.
밥을 다 먹고 누워서 자는데 새우잠을 자던 내게 누군가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고 갔다. 선잠을 이루고 있어 그때의 감각과 기분이 또렷하다.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뭉클했다. 탑승하고서 이불을 줄지 물을 때 몇 번이고 마다했는데 새우잠을 자고 있는 내 위로 이불이 올라왔다. 이불이 내 위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얹히던 때의 느낌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2018년 파리를 여행할 때 처음 에바항공을 이용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인데 이코노미든 비즈니스든 안 좋은 기억이 없다. 에바항공 딱 기다려! 돈 벌어서 또 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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