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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기억

뻐렁치는 날씨와 함께한 제주도 여행

by 루트팍 2020. 12. 28.

지난달, 친구들과 제주도에 다녀왔다. 

 

지난 태국 여행 이후에, 우리가 다시 여행을 함께 갈 수 있는지 없는지에 꽤나 큰 논란이 있었으나 무사히 다녀왔다. 화창한 날씨가 내내 계속됐다. 그냥 좋다고만 말할 날씨가 아니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울컥 쏟아져 나오거나 괜히 슬퍼질 정도로 쾌청했다. 그런 날씨 덕에 사사로운 기억이나 감정은 금세 뒷전이 됐다. 좋았다. 나와의 긴 여행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친구들은 어땠는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도 충분히 좋았기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이는 한라산은 처음이었다.
동쪽을 향해 달렸다.

 

쾌청한 날씨에 더불어, 편안한 이동까지 여행의 질을 높였다. 다섯 명 중에 두 명이 운전을 할 줄 알았고, 그들 덕에 차로 남과 북을 동과 서를 편히 오갔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김영갑 갤러리에 갔다가 숙소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보던 노을을 생각하곤 한다. 부러 느린 노래를 틀어 충만한 감정을 만끽하려 애썼다. 그러길 참 잘했다고 느낀다. 그때의 그 Sweet sorrowr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매개한다. 와중에 나보다 더한 K팝귀신 현호가 느린 노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즉각 잠을 청한 게 너무 웃겼다. 인지도 쩌는 가수에는 반응을 해야겠던지 악동뮤지션 노래에는 반응을 해서 존나 더 웃겼다.

 

 

해가 지는 곳으로 계속해서 달려가며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색깔을 따라가던 기억

뒤로는 어두워질 준비를 하는 지나온 풍경이, 앞으론 아직은 붉거나 노랗거나 하며 이글거리는 하늘이 펼쳐졌다. 열심히 달렸지만 결국에 자동차는 빛보다 느리니까 우리 주위로 어느새 어둠만 남았다. 내일이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갈테고, 그러면 사무치게 아름답던 바다와 하늘과 나무는 거짓말 같은 게 될 것 같았다.

 

다른 아름다운 것들을 아주 많이 본데도 뚜렷하게 남을 것 같다.

 

 

송악산 둘레길에서
공천포 바다와 현호

 

 

오랜만에 공천포에도 갔다. 5년 전 여름, 우리는 이곳에서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쇠소깍에서부터 한참을 구비구비 걸어와 밥을 먹었다. 멈추지도 않고 땀이 나는 더운 날이었고, 걸어도 걸어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아 지친 상태에서 밥집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전경을 해버려서, 아주 덥고 지쳐서 밥맛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 있다. 와인도 한 잔씩 했는데 탈수 상태에 들이켜서 아주 효과가 좋았던 것 같다. 밥이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 와인을 엎질렀는데도 즐거웠다. 탈수와 알콜 콤보로 인해 즐거움만 남고 기억력은 잠시 휘발했는지 아직도 그때 와인을 쏟은 게 누군지 흐릿하다. 얼마 전에 물어보기도 했는데 또 까먹었다. 진희였나? 아.....그냥 내 기억력 문제인가 ㅎ

 

공천포 바다는 아름답다. 멋진 검정 돌바닥과 바위, 그리고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주차장 옆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담에 발을 올리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혼자든 친구들과든 비슷한 느낌을 언제나 받았으니 분명 그곳의 정취라고 확신하고 싶다.

 

카페 레이지박스도 오년만에 갔다

 

 

일 년에 서너 차례 제주도에 가지만 활동 반경이 성산과 구좌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한동리와 평대리에 좋아하는 친구들이 살고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제주도가 너무나도 넓어 돌아다니기 귀찮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여행 후에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주도에 호기심이 왕성하던 2014년, 2015년에 갔던 곳들을 다시 찾으니 그때 내가 그곳을 좋아하던 이유가 그대로 있었다. 이번에 친구들과 가보지 않았던 곳도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괜히 가서 앉아있던 스타벅스 중문DT점과 대평리 바닷가가 특히 궁금하다. 이렇게 떠올리다 보니 대평리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식당에서 항상 맛있게 밥을 먹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친구 앞에서 제주박사인 척을 항시 했는데 이제 이실직고 해야겠다. 제주바보로 타이틀 변경합니다. 아직도 '우와우와', '대박대박'하면서 감탄할 곳이 넘쳐난다. 차분하게 연구자의 마음으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분석하는 태도를 가지기에 이르다. 10년 뒤쯤이면 그 자격을 취득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때까지 부지런히 감탄하고 감격하면서 제주와 서울을 오가겠다.

 

 

김영갑 갤러리 앞에 있던 귤밭
아름다운 제주의 식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