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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하루의 면면

가장 사적이어야만 하는 나의, 책모임

by 루트팍 2022. 1. 19.

아주 대박적으로 오랜만에 국민대 책모임이 재결합했다.

2020년 늦은 여름에 각자 글을 지어 와 읽어보는 글 모임을 한 이후로 1년 4개월 만이었다. 지난번처럼 급하게 만난 것이 아니기에 모두가 성실하게 책을 읽고 만났다.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를 읽고 만났다. 아마도 [일의 기쁨과 슬픔]도 이 모임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맞는지 모르겠다. [달까지 가자]는 다솜이가 지난 내 생일에 선물해준 책이어서 그때 바로 읽고서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번 모임을 위해 다시 한번 읽었는데 등장인물들에게 더 큰 애정을 느끼게 돼서 더욱 과몰입하며 읽게 됐다. 두 번 읽은 나뿐만 아니라 모임원 모두가 너무너무 재밌다고 만나기도 전부터 드릉드릉했다.




집에는 승민이가 먼저 도착을 해서 떠드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으며 안락의자에 앉으래도 자꾸만 침대에 앉았다. 앉아서는 자꾸만 먹고 싶은 걸 다 말하라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대체 뭐까지 사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대뜸 우리에게 쓰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깝다는 나사 빠진 대답을 했다. 요즘 쭈욱 빠진 주가에 마음이 아프던 나는 이때다 싶어 500만 원만 빌려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승민이는 갑자기 먼 곳을 바라보며 “너희한테 쓰는 돈 하나도 안 아까워”라며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자꾸만 물어도 같은 대답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나도 함께 먼 곳을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우리 집은 고작 여섯 평이라 집안에 먼 곳이라곤 없는데 각자 알아서 먼 곳을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아마 500만 원은 안 빌려줄 것 같다.

이어서 소현이가 도착했다. 소현이는 연예인에 미쳐 이 세상과의 SINK가 끊긴 탓에 승민이 만큼이나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너무나 여전해서 그 어떤 이질감이나 위화감 없이 떠들 수 있었다. 승민이와 소현이까지 마주하고 나니 내가 이 사람들을 정말 보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다들 너무 오랜만이라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대화를 하며 웃었다. 고장 난 소현이가 입방정을 떠는 바람에 또 재미있게 웃을 수 있었다. 늦은 여름 같았다.






지영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내려가서 술을 잔뜩 사왔다. 책 아야기를 하기도 전에 신이 잔뜩 나버린 우리는 일단 소맥을 말았다. 만나기 전에는 책 이야기를 3박 4일 정도는 할 것처럼 호들갑들을 떨었는데, 정작 만나니 각자의 근황을 묻느라 책 얘기는 까맣게 잊었다. 지영이는 도착과 동시에 실언 혹은 플러팅을 하면서 우리 모임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다. 차마 글로 적을 수 없을 정도로 숭한데 너무 재밌어서 바람에 밤새 그 말만 들으면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지영이의 발칙함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언제나 잊지 말자 북. 섹. 금(북리뷰 내 섹스 금지)



숭하다. 왜 이랬는지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 주자 선아가 오면서 소현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방역 수칙 괘씸하다.
선아 역시 오랜만이었다. 얼마나 오랜만이냐면 안 본 사이에 선아가 이직까지 했다.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어 나타난 선아를 막 축하했더니 승민이와 함께 지불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서로 이걸 사겠다 저걸 사겠다 하면서 이것저것 시켰는데 시키다 보니 어마어마한 양이 됐다. 찜닭과 엽떡으로 시작해 마라탕과 빙수까지. 거기에 소맥까지 계속해서 말아먹는데 지불 경쟁이 계속돼서 소맥이 무한리필이었다. 다음날 정산을 하는데 “XX는 누가 샀어?”라고 물으면 ARS처럼 “한승민”이라는 대답이 나와서 , 그는 ‘또승민’이 되었다.

선아가 지불 경쟁에서 밀리는 느낌이 들자 갑자기 나를 대신해 내 잘못을 회개해줬다. 미션스쿨 출신으로서 화려한 기도 실력을 자랑했는데 죄인 박정자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시연 같았다. 화살촉은 명함도 못 내미는 기도 실력에 모두가 빡빡 웃다가 옆집 선생님께 혼이 났다. 너무 죄송한데 너무 웃겨서 멈추질 못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소맥을 매콤하게 들이키며 책 얘기도 했다. 질펀하고 너절한 이야기만 하다가 갑작스레 책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했지만 우리 모임의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다잡았다.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이 엄청나게 또렷한 소설이어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매우 거리가 가까운 인물들이어서 과몰입을 잔뜩 하면서 떠들었다. 모임원들 모두가 과몰입 장인이어서 각자가 인물들에 느끼는 감정이 생생했고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선아가 먼저 떠나고 그다음으로 승민이와 지영이가 떠났다. 서로 결제를 하겠다고 마구 경쟁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이좋게 치우지 않고 떠났다. 이 괘씸한 인간들. 다음 날 홀로 남아 세 시간 동안 치워야 해서 고되었지만 지난밤의 여러 에피소드를 떠올리니 흥이 올라서 괜찮았다.




책모임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들이지만 책모임을 할 때 너무 귀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책모임을 했으면 좋겠다. 아주아주 가끔 만나서 소맥을 와구와구 마시더라도 책모임이라고 박박 우기면서 만나고 싶다. 다만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말들만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꽁꽁 숨겨야 하는 것이 애석하다.

2월에 다시 만난다. 가장 사적이어야만 하는 나의 책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