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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하루의 면면

주말 전시 나들이

by 루트팍 2021. 3. 23.

 

  주말에 전시 하나를 보고 왔다. 'FEUILLES'라는 이름의 전시였는데 이름처럼 이파리들을 그린 작품들이 잔뜩인 곳이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 날 가게 됐는데 하마터면 못 갈 뻔했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31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날은 21일이었다. 그 사실을 다솜이가 21일 열 두시에 알려줬고. 곧장 세 시간 뒤에 전시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솜이와는 거의 반 년 만에 만나는 거였다. 2019년 12월 30일에 파리에서 작별하고는 2020년 여름에 한 번 보았고 다시 이 날 만났다. 노량진에서 같이 학원을 다닐 땐 매일 두 끼니를 같이 해결하곤 했는데, 이젠 언제 만나도 오랜만이다.

 

엄유정:FEUILLES

  전시가 이루어지던 소쇼는 가정집을 개조한 곳이었다. 공간이 매우 협소해 그림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야 했다. 예상대로 너무 귀여운 그림들이 많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날씨는 따뜻한데 이파리들은 무성하지 않아 아쉬운 요즘, 딱 좋은 전시였다. 모조리 가져다 내가 사는 집에 걸어두고 싶었다.

 

  그림들이 너무 귀엽다고 생각을 하면서 둘러보다가 너무 정신이 없어 금방 빠져나오게 되었다. 다음에도 이 전시 일정이 잡힌다면 사람이 없는 평일 오후에 가서 하나하나 제대로 보고 싶었다. 그땐 전시 기간도 제대로 인지하도록 기강을 잡아야겠다.

 

 

  전시장에서 나와 곧장 창덕궁으로 갔다. 언덕을 넘어가면서 하늘과 구름이 너무 예뻐서 감탄했다.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언덕에는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독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창덕궁 담 너머로 여러 빛깔의 꽃들이 보여 들뜬 마음으로 창덕궁에 들어갔다. 정말 오랜만에 궁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요즘 서울의 궁들은 입구에서 신용카드를 바로 꽂으면 결제와 입장이 이루어진다. 이건 창경궁을 지날 때 현수막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창덕궁에도 적용되는지는 모르고 갔다. 매표소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잔뜩이라 표 없이 곧장 입구로 가는 것을 다솜이가 불안해했다. 나도 사실 불안했는데 안 그런 척하며 입구로 직진했다. 다행히 IC칩을 꽂으니 문이 열리는 시스템이었다.

 

창덕궁 돈화문 근처에 있는 미선나무

 

  돈화문을 지나자마자 꽃이 가득이었다. 졸귀시키를 연신 외치며 육중한 몸을 끌고 꽃들에게 달려갔다. 나와 다솜이는 이름 모를 꽃 앞에서 졸귀시키 졸귀시키 하면서 서있었고 우리 옆에는 멋진 카메라로 그 꽃을 찍는 분이 계셨다. 당연히 그분은 이름을 알 것 같아서 괜히 큰 소리로 다솜이에게 "얘 이름은 뭘까?"하고 물었더니 곧바로 그분이 응답했다. "이건 미선나무예요"

 

  식물들 옆을 서성일 때 비슷한 일을 겪고는 한다. 식물 앞에 서성거리다 보면 식물의 고수가 조용히 다가와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식이다. 식물의 고수가 되면 말수가 많아지는 건지,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생기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보통 내게 유용하니 좋은 일이다. 그분들 덕에 여러 식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소쇼만큼이나 창덕궁도 붐비는 곳이었다. 소쇼에는 이파리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이, 창덕궁에는 봄꽃을 보러 온 사람들이 가득이었다. 특히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쪽에 있는 홍매화 근처에 사람들이 많았다. 아주 거대하고 울창해서 멋있었다. 그치만 이제 사람은 그만 보고 싶어서 대충 쓱 보고 떠났다.

  

  다시 돈화문으로 가면서 저녁 메뉴를 결정하기로 했다. 사실 이미 마제소바를 먹겠다고 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먹었고, 다솜이에게 냉큼 제시했다. 다솜이가 그럴 줄 알았다고 했고 경복궁에 가서 마제 소바를 먹기로 했다. 머쓱했다. 이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으로 살면 사람들에게 밉상으로 낙인찍힐 텐데 걱정이다. 이미 어느 정도 밉상 캐릭터로 자리 잡힌 것 같기도 하고.........여튼 걱정이다.

 

 

  경복궁 칸다소바까지 걸어갔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날 무렵에 갔는데 이미 줄이 잔뜩이어서 깜짝 놀랐다. 한 번도 줄을 서서 먹은 적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주말은 주말이구나 싶었다. 한 달 만에 다시 먹는 마제 소바는 똑같이 맛있었다. 다솜이도 맛있게 먹어서 뿌듯했다.

  매달 맛있는 칸다소바가 참 좋다. 이날 혜화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더 가까우니까 자주 가서 먹어야겠다.

 

 

  밥을 먹고는 카페 두 군데에 갔다.

 

  원래 대충유원지에 가서 커피를 마시려는데 만석이라 입뺀을 먹었다. 스코프도 여섯 시까지 한다고 해서 돌아 나왔다. 서촌을 떠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광화문에 있는 테라로사에 갔다. 다솜이는 벚꽃 블렌드를, 나는 르완다 어쩌구를 먹었다. 다솜이가 시킨 게 너무 맛있어서 절반을 훔쳐먹었다. 다음에 가서 또 마셔봐야겠다. 

 

  

  커피를 도둑 맞아 사실상 커피를 안 마신 것이 되어버린 다솜이가 뿔이 났는지 다른 카페도 가자고 했다. 수수커피에 가서 커피 한 잔을 더했다. 내가 또 훔쳐먹을까봐 걱정됐는지 다솜이는 레몬티를 시켰다. 거기서도 도란도란 떠들다가 광화문 역에서 헤어졌다.

 

  재미난 하루였다. 어딜 가나 사람이 한바가지씩 있어서 괴로웠는데, 그럼에도 아주 재미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