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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하루의 면면

주말 수목원 나들이

by 루트팍 2021. 3. 15.


며칠 전 효연이가 숲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숲이라는 말에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원래는 화담숲이라는 곳에 가려고 했는데 휴무이길래 광릉 국립 수목원이라는 곳에 갔다. 수목원이라 이름 붙은 곳에 처음 가보는 거라 아주 설렜다. 늘 존재하던 불면에 들뜬 마음이 더해져 잠을 설쳤다. 딱 한 시간 반만 자고 출발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먹기 위해 빅파이 두 박스와 젤리도 세 봉지 샀다.



운전은 지원이가 맡았다. 숲에 놀러가는 것도 이미 너무 좋은데 친구가 운전까지 해줘서 더 좋았다. 출발하기 전에 효연이가 젤리 두 봉지를 꺼내길래 나도 빅파이와 젤리를 꺼냈다. 이미 만날 때부터 마구 웃었더니 젤리 다섯 봉지와 빅파이 두 박스를 보고도 배를 잡고 웃었다.
지원이는 운전석에, 예지는 조수석에, 그리고 나와 효연이는 뒷좌석에 앉아 웃었다. 친구들이 직장에 시달려 웃음이 줄었을 줄 알았는데 여전했다. 웃긴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면서 달리다 보니 금방 수목원에 도착했다. 광릉 국립 수목원은 잠실에서 멀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앞에 가는 어린이를 따라하는 모양이 됐다.



수목원에는 자동차도 사람도 많았다. 움이 트는 때에 이정도라면,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푸르를 땐 아주 붐비는 곳이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을 따라 우리도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에 비치된 지도를 가져와 보면서 걸었다. 여러 이름의 길 중에 전나무 숲길로 가보기로 했다. 몇 주 전에 와본 적이 있는 효연이가 그곳에 가면 푸른 전나무를 볼 수 있다고 말해줬다.



전나무 숲은 아주 멋졌다. 보기에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진한 나무 향기 덕분에 상쾌하기도 했다. 곧은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높은 전나무가 눈에 계속 들어와 탄성을 내뱉었다. 입구에서 조금 실망한 것이 무색했다. 이런 숲길이 집 근처에도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겠다. 오패산 말고 다른 숲길을 좀 찾아 걸어봐야겠다.

난대 온실의 귀여운 식물들



이 수목원에는 멋진 온실도 있었다. 열대 온실이 있다길래 그곳에 가려고 했는데 안타깝게 그곳은 휴관 중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난대 온실이 있어 냉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따뜻하고 촉촉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잎이 넓고 반질 거리는 다양한 나무들과 귀여운 꽃들이 가득이었다. 연신 귀엽다고 소리를 내며 하나하나 살폈다.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며 냄새를 맡고 사진을 찍는 게 웃겼는지, 그런 나를 지원이가 계속 찍었다. 액자식 구성이 되어버렸다.

요즘 같은 날씨에도 쉽게 더위를 느끼는 뚱보이지만 이런 것들을 매일 볼 수 있다면 남쪽에 살고 싶다. 매일 그렇게 땀을 삐질 거리며 식물들을 관찰하러 다니다 보면 살이 좀 빠질 것도 같다. 여러 모로 개이득일 것 같은데 제주도에 일자리를 찾아봐야 하는 걸까?



온실까지 구경하고 밥을 먹으러 갔다. 예지가 좋아하는 밥집으로 갔다. 한 시간 동안 대기를 해야하는 맛집이었다. 재잘거리며 밥을 먹고 나와서 가까이 있는 절에도 갔다. 지금은 이름을 까먹었는데 광릉 국립 수목원에서 가장 가까운 절이다. 그곳에는 여러 연못이 있었다. 연꽃이 피었던 자리, 물을 떠다니는 거북이, 먹이 주는 척에 속지 않는 붕어 같은 것들을 보았다.

헤엄치는 거북이의 발이 너무 귀여워서 친구들에게 "발 봐봐!!"하고 말했는데 효연이가 "뭐?!?! 왜 그런 말을 해?" 하며 역정을 냈다. 내가 "밟아봐!!"라고 한 줄로 오해해서 그랬단다. 거북이를 밟았다간 나는 뚱뚱한 데다 수영도 못 해서 익사를 할텐데. 괜한 걱정이다.

거북이


여기서 아주 웃긴 에피소드도 하나 생겼다.

예지가 법당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각자 아무렇게 서서 예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나온 예지가 나와 효연이 사이를 바라보며 "거기서 뭐해?" 하고 물었다. 나와 효연이 사이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으니 허공을 향해 물은 거였다. 갑자기 나는 오싹해지기 시작했고 영험한 공간에 와서 무언가에 씐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친구가 이렇게 내림을 받는 건가 싶어 무섭기도 하고 걱정이 됐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예지에게 무슨 말이냐고 무얼 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다가오던 예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겁에 질린 채로 예지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았다. 지원이와 옷차림이 같은 사람이 서있었다. Similar Look이 아니라 Same Look을 입고 계셨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지원이가 몰래 그 분의 옆에 서서 브이를 했다. 너무 웃겼다. 도플갱어를 만나 죽을 뻔한 상황에도 장난꾸러기의 모습을 잃지 않는 지원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원이에게 도플갱어를 만나 죽을 뻔했다고 일러주었다. 지원이는 혹시 죽을까봐 그와 눈은 맞추지 않았다며 내 걱정을 덜어주었다. 절을 빠져나오면서도 이게 계속 생각나서 웃었다.

잠실역 사거리 인간신호등



절까지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잠실에 다와서는 좌회전 신호를 타지 못해 애매한 위치에 정차하게 됐다. 신호가 보이지 않는 지원이를 위해 인간신호등이 되어주기도 했다. Vamos를 외치며 좌회전을 하는데 바람도 시원하고 볕이 따뜻해서 좋았다. 빌린 차를 반듯이 다시 반납해놓고 카페에 가서 떠들었다. 맥주를 마시자고 친구들을 꾀어 맥주집에도 갔다. 생맥주를 딱 두 잔 마시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 날을 관통하는 대화 주제는 '남 욕'이었다. 온갖 편견과 혐오를 버무려 친구들 흉을 봤다. 사람을 얄팍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평가하면 쉽게 우스워진다. 이렇게 하면 누구든 욕할 거리가 생기고 그걸 재료로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다. 흉보기가 나쁜 건 줄 알면서도 쉽사리 끊을 수가 없는 이유다. 아침부터 밤까지 온갖 친구들 흉을 다 보면서 내린 딱 하나의 결론이 있다.

'절대 모임에 빠지지 않기'


흉보기는 대체로 너무 웃겼지만 특히 더 웃겼던 것도 있다. 효연이가 혁이의 음악취향에 대해 말하면서 "혁이가 음악에 프라이드가 있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P를 F로 발음했다. 우리는 귀신 같이 그것을 캐치해 "혁이가 음악을 튀겨!?!" 하며 효연이를 조롱했다. 너무 웃겼다.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 사냥감이 되는 걸 보니 모임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