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마드리드로 떠나며 블로그에 나의 6개월이 꽉 들어차게 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번 여름까지 쓴 글은 없다.
2019년 8월 중순, 블로그의 이름을 정하는 데 3일을 고심했다. 그리고 출국 전날까지 매일 글을 쓰는 내 자신을 상상했다.
경유지인 파리에서의 막간 여행기부터 마드리드 정착기, 그리고 미리 잡아둔 포르투갈 여행기까지 이미 쓸거리들이 넘쳐나 자신감이 충만했다.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까지 아빠 차를 얻어타며 블로그 글쓰기 계획을 (상상으로만) 다 세웠다.
비장함이 절절 흐르는 내 상/망상 - ' 첫 글은 서툴테지만 계속해서 글을 쓰면서 문장력이 늘어갈 거고,
간혹 나의 역량을 넘어서는 감성적인 문장들이 나도 모르게 써져서 주변의 찬사를 받겠지?'
하지만 파리까지의 비행은 너무 길어 피곤했으며 파리에서의 하루는 소매치기 걱정으로 가득찼다.
차분한 마음으로 그럴싸한 글을 써내기엔 내 마음이 넉넉치 않은 것 같았다.
( 2019년 8월 21일의 나 - No간지도 이런 노간지가 없다. 내게는 세상 사람들에게 파리를 가장 사랑하는 척, 가장 잘 아는 척하면서 파리잘알로 활동한 전적이 있다. 하지만 1년 만에 찾은 파리에서 어김없이 벌벌 떨었다. 어떤 망상까지 했냐면, 내가 에어팟을 꽂고 샹젤리제를 걸으면 누군가 내 에어팟을 뽑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개선문부터 루브르까지 음악 없이 걸었다. 당시 나는 NCT127의 'Simon says'라는 노래를 아주아주 좋아했고 주문을 외워 I'm god 언제 어딜 가나 그 노래를 에어팟을 통해 들었다. 너희를 홀려 like WOW 그러니 그 먼 길을 텅빈 귀로 걸었다는 건 내가 아주 많이 떨고 있었단 증거다. NCT we all so sexy 그치만 그 노래에 무척 빠져있었기 때문에 내가 대신 불렀다. NCT noise you can't break me )
그 때 이 글을 인스타그램이 아니라 블로그에 작성했다면?
그 때의 나는 블로그에는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과장도 버리고, 정제되고 그럴싸한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마 블로그에는 글을 적지 못하고 원래 대로 인스타그램에 (가끔씩) 하루를 기록했다. 그러니까 저 우스꽝스러운 글은 글쓰기에 대한 나의 비장한 태도로부터 탄생했다. 블로그에 올릴 글과 인스타그램에 올릴 글의 계급을 나누고 Classy한 글이 샘솟기를 기다렸다.
원통하게도 글은 샘솟지 않았다.
본디 비장함은 실천의 동력이 되거나 실천이 비장함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거의 10년 동안 뭔가를 마음 먹고 실천해내는 경험이 내게 없다. 보통 실컷 비장하다가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한 나를 마주하는 루틴을 반복해왔다.
하얀 바탕의 텅 빈 블로그는 당연한 결과다.
마드리드에서 살아가면서도,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블로그에 적는 글이 없으니 비장한 마음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2020년 2월 한국에 돌아와 반성하는 시간을 한 차례 가지기는 했지만, 반성이 글을 써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좀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친구 소현이가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덩달아 지영이도 멈췄던 블로그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친구들이 깔깔대며 있었던 일이랄지 생각이랄지 하는 것들을 쓰니까 너무 재밌어 보였다. 나도 하고 싶어졌다. 비장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아무거나 쓰는 연습을 하려고 쓴다. 비장해봤자 별 거 아닌 나를 빨리 발견할 뿐이고 그러면 나는 무력해지고, 나는 여전히 빈손이다.
이렇게 쓰면서 이 글도 존나 비장해진 것 같다. 아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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