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란 무기력을 건너
재미있는 일상을 되찾았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여름을 보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무기력해졌고 그 일상은 사라졌다. 겨우겨우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해치우거나 혹은 해치우지 않거나 하며 가을과 초겨울을 지나왔다. 지금은 겨울의 한복판이고, 늦은 여름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그때처럼 지내고 싶다.
그간 무럭무럭 잘 자라던 고낙이(나의 고수 화분)가 시들어 죽었다. 내가 내 삶에 무관심해지니까 즐겁던 청소와 빨래도, 화분 돌보기도 하지 않게 됐다. 여느 무기력한 때와 다름없이 과제도 제때 제출하지 않았고, 종종 수업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ZOOM을 켜고 그저 듣고만 있으면 될 일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출석만큼이나 결석이 손쉬운 온라인 강의. 눈을 뜨고 움직이지 않겠다는 조그만 결심으로도 결석을 할 수 있었다.

누워 지낸 덕에 몸은 더 불었다. 무기력하다면서 밥을 먹을 기력은 넘쳤던 것 같다. 귀찮으니 자주 음식을 배달시켰고, 그것들은 보통 혼자 먹기에 많고 짜고 기름지다. 하루종일 가장 많이 움직이는 건 1층 편의점에 가거나 분리수거장에 갈 때였다. 밥은 그대로 혹은 더 많이 먹고 훨씬 적게 움직이니 몸이 불어나는 건 아주 당연하다.
그래도 무기력한 덕에, 온종일 집에 머무르게 된 상황 덕에 아름다운 하늘을 자주 보았다. 해질녘이 되면 하늘은 날마다 조금씩 다른 빛깔로 물들었고 그 위에 얹은 구름들이 장면을 완성했다. 어떤 날엔 아름다운 하늘을 발견하고 '아름답다!'를 연신 외치기도 했다. 아마도 그렇게 본 것들이 쌓이고 쌓여 무기력을 조금씩 밀어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기말고사를 볼 무렵부터 다시 활기차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죽은 고수를 치우고 새로운 고수 씨앗을 심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시험공부를 했고 무사히 학기를 마쳤다. 그리고 고낙이가 다시 태어났다. 어제 움을 틔운 고낙이를 확인하고서, 처음 고낙이 싹을 보던 때의 감격을 복기했다. 식물을 가꾸는 일이 내 일상을 돌보는 일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 집 안방 발코니와 거실 창가를 전부 화분으로 채워놓은 엄마에게 감사했다. 그가 그렇게 하루를 돌보는 데 열심이고 내가 그 덕을 아주 크게 누리고 사는구나 하는 감동도 덤이다. 최근에 전화번호부에 엄마와 아빠를 'OOO(두 분의 존함)선배'라고 각각 저장했는데 너무 적절하다. 그들은 역시 내 인생의 선배다. X형, X누나로 승격할지 말지는 앞으로 그들의 행보에 달렸다.
이 글은 세 달 간의 무기력을 지나 활기찬 일상을 되찾으려고 한다는 글이다. 아직 전만큼의 의욕을 되찾지는 못했다. 리부트 정도만 했다. 삐걱대며 재시동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오늘까지 다 읽으려고 한 책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책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한다. 책이 너무 두껍고 번역된 문체가 가독성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오늘은 아예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하려고 한다. 12월에 사놓고 읽지 못한 다섯 권 중 한 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