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미/하루의 면면

올해 제일 두려운 일

루트팍 2021. 12. 18. 16:44


“진희야, 어디야? 침착히 들어”

김정우 신당




진희를 만나고 왔다. 진희에게 NCT 앨범을 주기 위해서였다. 앨범 여러 장과 참치 한 캔, 스팸 한 캔, 과자 한 봉지를 챙겨 그의 집쪽으로 갔다. 지난 번에 함께 가본 적이 있는 진희네 집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앨범만 가져온 줄 알았는데 큰 근심거리도 들고 왔길래 내친김에 늘어놓았다. 내 근심을 잔뜩 쏟아내고서 머쓱해져 진희의 근심도 억지로 풀어놓도록 만들었다. 진희가 원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함께 나누니 근심에 온기가 붙어 조금 참을 만한 어떤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두 번째 신당


이야기를 마치고 마침 빌리고 싶은 책이 있어 그의 집으로 갔다. 진희의 지난 집엔 한 대만남자의 신당이 있었는데 이번엔 NCT 정우의 신당이 차려져있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정우의 사진이 있어 정우와 끝없이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의 덕질은 덕질이라 하기엔 너무 신을 모시는 재질이라 신을 모시는 행위라고 칭한다. 진희네 집에 들어서자마자 꽤나 오싹해졌는데 아마 김정우신의 기운이 닿은 것 같았다. 오싹함에 급하게 대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쓰게 됐다.

잠깐 화장실에 들른 것이 올해 제일 두려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진희야 미안해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짐을 챙겨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맞으며 성큼성큼 걷는데 다시금 오싹해졌다. 분명히 변기 커버를 닫은 기억은 있는데 물을 내린 기억이 없었다. 소복이 눈이 쌓인 길거리에 멈춰서 육성으로 “좆됐다”라고 말했다. 손을 벌벌 떨며 메시지를 보냈다.

레버 한 번더 눌러줘. 제발

같은 톡방에 있는 못된 친구들이 마구 웃기만 하고 진희는 답이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급하게 아주 다급한 용건을 말했다.


“진희야, 어디야? 침착히 들어. 내가 물을 내린 기억이 없어. 제발 변기 커버 열지 말고 물을 한 번 더 내려줘.”





이 말을 들은 진희는 내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고 빡빡 웃어댔다. 그 몇 초 동안 애간장이 녹아 사라졌다. 한참 웃고서야 내가 물을 내렸던 게 맞다고 얘기해줬다. 길 한복판에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내가 남의 집에서 대변을 보고 물을 안 내리는 그런 극악무도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올해 제일 두려운 일이었고 올해 제일 안심한 일이기도 했다.

다신 겪고 싶지 않다. 물을 내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