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미/하루의 면면

남산에 남산에 살어리랏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

루트팍 2021. 10. 9. 16:54

 

2박 3일 호캉스를 다녀왔다.

하루는 신라스테이 서대문에 묵었고, 하루는 밀레니엄 힐튼 서울에 묵었다. 이틀 다 힐튼에 묵었으면 아주 좋았겠으나 백수인 나에게 그만큼의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룸은 트윈 이그제큐티브 마운틴뷰였고 아주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러운 이유를 찾자면 아주 여럿인데, 그중에서도 룸과 라운지에서 보이는 남산의 경관이 최고다. 아직도 그것이 눈에 아른거려서 괜히 예약사이트에 들어가서 일별 가격을 찾아보고 있다. 

 

 

새벽에 찍은 로비, 건너편은 cafe395 다.

 

 

일단 힐튼은 로비가 굉장히 으리으리하다. 층고가 엄청나게 높은 와중에 지하 다이닝 아케이드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정중앙에 배치했다. 엄청나게 큰 기둥들이 2층까지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앙을 비운 배치가 높은 층고와 만나 기분 좋은 개방감을 준다. 옛날에 지은 호텔들은 이렇게 로비를 으리으리하게 짓곤 했다고 하는데 새 호텔들도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 로비를 돌아다니는 것부터가 너무 재밌는 곳이다.

 

체크인 카운터은 회전문을 통과하면 오른편 끝에 있다. 호텔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도를 유지하는 반면에 체크인 카운터는 해가 아주 잘 드는 곳이다. 다양한 성향의 손님을 응대하는 직원들이 그래도 채광이 좋은 곳에서 일을 하면 기분이 조금 나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투숙객들이 주는 스트레스가 더 클 수도 있겠지만.......

 

 

트윈 이그제큐티브 마운틴뷰, 1925호. 창문 좀 닦아주세요

 

 

체크인을 하고 곧장 룸으로 갔다. 신라스테이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드넓은 방이 아주 기분 좋게 느껴졌다. 창가로 호다닥 달려가 커튼을 젖혔는데 곧바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개짱 멋있는 풍경이었다. 초록 잔치를 연 남산과 한양도성, 그리고 뾰족한 남산 타워가 그림처럼 놓여있었다. 유선이와 나는 창에 붙어 한참을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이랬다.

 

'이 풍경은 우리가 낸 돈의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다.'

 

 

라운지에서 커피와 주스를 마셨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호텔 곳곳에 있는 시설들을 알차게 즐길까 계획을 짰다.

 

가성비가 좔좔 내려오는 호텔 이용을 하기 위해 이그제큐티브 라운지를 먼저 찾았다. 얼리 체크인을 두 시간이나 일찍 해서 애프터눈티를 즐길 수 있었다. 애프터눈 티라고 해서 3단 트레이에 담은 다과를 제공하는 그런 류의 것은 아니었고 다른 시간대보다 핑거푸드 몇 가지가 더 깔리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이고 뭐고 할 것이 없는 게, 그냥 남산이 3단 트레이다. 한양도성이 1층 백범 광장이 2층 남산타워가 3층. 커피 한 모금하고서 남산을 쓱- 한 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다.

 

 

오후 여섯시부터 해피아워

 

 

객실로 돌아가서 유선이는 조금 더 자고 나는 헬스장에 다녀왔다. 그리고 다시 라운지로 갔다. 여섯시부터 해피아워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술 이것저것과 음식 몇 가지가 더 준비되는데 화이트 와인과 유산슬을 주로 먹었다. 콜드 파스타 한 종류도 너무 맛이 좋았는데 아주 작은 접시에 제공되어서, 한 바가지로 따로 가져다달라고 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노을이 지는 남산을 바라보며 배불리 취해가니 아주 행복했다. 

 

 

 

 

소화를 조금 시키고서 수영장으로 갔다. 실내 수영장은 2층에 있고 룸키를 찍고서 들어갈 수 있다. 큰 특징은 수영모를 착용해야 이용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게 아주 재미있다. 유선이와 나는 서로가 수영모 쓴 꼴이 우습다고 한참을 깔깔댔다. 모습은 너무 우습지만 수영장은 세 개 래인이 깔려서 꽤나 본격적이며 근엄하다. 끝으로 가면 1.5M 깊이까지 깊어지기 때문에 박태환에 빙의하는 것도 쌉가능이다. 물론 나는 오래전부터 '고개숙인남자수영법'만을 구사했기 때문에 끝과 끝을 멋지게 오갈 수는 없었다. 옆 래인의 어린이와 경쟁 비슷한 걸 시도하려고 했으나 수영을 할 때 숨을 쉴 수 있는지 없는지는 엄청난 차이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10초 정도만 앞으로 가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기 때문에 얼른 일어서서 옆을 지나는 수영 고수들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YMCA에 다시 등록해야 하나, 아주 고민이 크다.

 

 

객실의 야경

 

 

수영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가 몸을 씻고 창문 앞에 앉았다. 유선이가 좋아하는 올드팝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고서 의자에 늘어져있었다. 한 소절씩은 무조건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바깥 풍경들과 잘 어울렸다. 그런데 유선이가 새 노래가 나올 때마다 Favorite song이라고 하길래 '얘가 favorite의 뜻을 모르나...?'하고 있었는데 본인도 머쓱한지 해명을 마구 했다. 유선이는 Favorite songs가 23984721309587134509234871개일 만큼 사랑을 고루 나눠줄 수 있는 따뜻한 친구인 게 분명하다.

 

 

정문 앞에 있는 키쓰뽀이&걸. 동상인 줄 알고 만졌는데 플리스틱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배가 꺼져서 야식을 시켰다. 객실에서 받을 수 없어 로비로 가야 했는데 내려간 김에 밤산책도 했다. 찬 공기를 맞으며 걷다 보니 금세 배달이 도착했고, 룸으로 가지고 가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잠을 잤다. 밤이 돼서야 침대에 처음 누웠는데 너무 편안한 베딩이어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

 

 

여섯시에 일어나 수영과 조식으로 미라클모닝 실천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을 한 번 더 했다. 아침에 가니 아주 평온한 분위기였다. 헬스장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수영장에는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전부였다. 나를 제외한 두 분이 엄청난 수영 고수였는데 두 사람이 쉬지 않고 래인을 오가는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로운 무림의 고수들 사이에서 나만 요란스럽게 '고개숙인남자수영법'을 선보였다. 고작 10초를 가다가 물밖으로 나와 가쁜 숨을 쉬는 내가 너무 웃겼다. 다시 한번 수영을 배우리라 다짐했다.

 

수영을 끝내고 Cafe395로 가서 조식을 먹었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푸른 바깥을 보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유선이가 올 때까지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배가 너무 불러서 금방 일어났다. 서울역 방향으로 조성된 산책로에서 조금 걷다가 방으로 올라갔다. 유선이가 그때까지도 깊은 잠을 자고 있길래 헬스장에 다녀왔다. 그사이에 유선이는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길래 욕조에 라벤더 이파리가 들어간 배쓰 쏠트를 풀어놓고 목욕을 했다.

 

 

 

 

목욕을 마치고 라운지로 올라가 커피를 마셨다. 전날과 같은 풍경인데도 여전히 너무 멋있게 느껴져서 좋았다. 가지고 올라간 책을 몇 자 읽다보니 졸렸다. 그래서 방으로 내려가 낮잠을 조금 잤다. 체크인을 할 때 체크아웃을 한 시까지 늦춰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해가 가득 들어오는데도 잠자리가 너무 편안해서 잠이 솔솔 쏟아졌다. 

그렇게 한 시가 거의 다 될 때까지 잠을 자다가 짐을 챙겨 나왔다.

 

 

로비에서 지하로 내려갈 때 위를 쳐다보면 이렇게 멋진 문양을 발견할 수 있다

 

유선이의 저녁 약속까지 시간이 떠서 서울로7017 위를 걷기로 했다. 컨시어지 짐을 맡기고 아침에 다녀온 호텔 뒤편 산책로로 갔다. 더 내려가면 서울로였지만 산책로 자체가 너무 멋져서 그곳에 앉아있기로 했다.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커피를 마시러 갔다. 봉봉처럼 젤리가 들어있는 애플민트 티를 마시다 보니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호텔 앞에서 유선이는 택시를 잡아 탔고, 나는 조금 걸어 내려가 회현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아주 훌륭한 가을 여행이었다.